[카테고리:] 설교/예배

  • [복음메시지]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복음메시지]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말씀제목]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겔37:1~14)

    [설교자] 오희도 목자님

    [설교일] 2024년 9월 14일 안식일 오전 예배

    오늘 말씀의 내용은 에스겔이 하나님께 받은 9가지의 비유 중에 마지막 환상의 비유인 마른 뼈 골짜기 비유입니다.

    1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하나님의 영(그 신)이 에스겔을 뼈가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실제 에스겔의 몸은 바벨론에 있었지만, 환상 중에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 골짜기에는 심히 많은 뼈가 있었는데 아주 말랐다고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마른 뼈는 사망을 상징하는 그림 언어입니다.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망의 그늘에 오래 빠져있는 해골들을 말하는데, 이것은 영적인 사망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시는 이 영적 환상을 통해 에덴동산을 떠난 이후 죄를 지은 자들이 많고,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많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뼈들은 육신은 살아있지만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합니다. (11절)

    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마른 뼈들을 살리겠다고 하시고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에스겔은 명령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그러자 뼈들이 소리가 나며 움직이더니 서로  결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뼈에 힘줄과 살과 가죽이 생겼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가능한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시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부활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가능하게 하신다는 것을 모두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이 뼈는 누가 살린 것일까요? 말을 한 사람은 에스겔이지만,  ‘살리라’고 하신 이는 바로 주 여호와입니다(5절). 에스겔은 그저 대언한 것 뿐입니다.  때때로 치유나 이적기사가 일어날 때, 그것을 행한 사람의 능력으로 아는 분들이 있습니다. 목자나 어떤 사람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난 일임을 아시고, 마른 뼈들을 살린 이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이 이치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과 능력이 있어 회복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세상에 그대로 전해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요6:63)

    9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생기를 향하여 대언하라 생기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 하셨다 하라

    10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11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위 구절들은 성령을 간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을 불어넣어서 살아나게 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성령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모든 성도들이 다시 살아나는 회복과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2-4)

    12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13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서 나오게 한즉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14 내가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살게 하고 내가 또 너희를 너희 고토에 거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이 일을 말하고 이룬 줄을 너희가 알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무덤을 열고 백성들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부활이라는 단어가 나와 있지 않지만 부활에 대한 개념은 있습니다. 세 곳에 나와 있는데 오늘 본문 말씀이 대표적인 구절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무덤을 열어 백성들을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다시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 즉 에덴의 회복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제서야 하나님께서 ‘내 백성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마른 뼈’에 생기가 넣어져 무덤에서 나오니 그들이 ‘내 백성들’이 되었습니다. 영적인 사망으로부터 부활까지 이르러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이룰 줄’이 아니라 ‘이룬 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14절)

    그러면 이 환상과 예언이 어떻게 성취되었을까요?

    먼저 이스라엘의 역사적으로 보면 첫 번째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지 70년 뒤에 풀려나 다시 돌아와서 성전을 건축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율법을 다시 세웠습니다. 두 번째로는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2500년이나 지난 뒤에 다시 건국되었습니다. 본문에는 이 뼈들이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인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한 이스라엘이 회복된 결과를 보며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보면 성령을 받은 후에 초대교회가 생기고 성장하였지만, 중세시대에 들어서 종교에 정치가 개입되며 교회가 변질되었습니다. 중세 교회의 타락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떠났습니다. 그런데 1917년에 다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스겔의 환상 속에 마른 뼈가 생기로 살아나듯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사도시대 이후 죽어있던 교회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늦은비 성령)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과 부활을 통해서 무덤을 열어주심을 예표합니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이후로 어떤 누구도 사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들에게 에덴의 회복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호13:14)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15:55)

    태어났을 때 이미 마른 뼈인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마른뼈들이 일어나듯이 사망의 무덤을 열고 부활해서 하늘나라 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여기를 눌러주세요. (유튜브 설교 바로가기)

  • [복음메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 (눅24:13~35)

    [복음메시지] 동행하시는 예수님 (눅24:13~35)

    동행하시는 예수님

    제목 : 동행하시는 예수님

    성경 : 눅24:13~35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은 믿음 생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향하는 두 제자의 모습이 나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두 제자와 함께 걸어가셨고,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눅24:16)

    성경에선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 앞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눈이 가리워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13:13)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어찌 예수님의 축복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눈이 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들의 눈을 가리게 한 것일까요?

     

    1. 미련하여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가라사대 미렪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24:25)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에도 나와 있고, 분명히 보여주고 계십니다.

    또한 부활하신 이후엔, 천사들이 제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깨닫지도, 알지도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 믿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그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만 보였던 것입니다.

     

    2. 더디 믿었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1:19)

    하나님의 말씀은 속히 듣고, 속히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소식을 듣고도, 예수님의 제자들은 더디게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바로 앞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1)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뵙기 위해선, 예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10:17)

    올바른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것에서 시작합니다.

     

    2) 예수님을 강권하여 예수님을 모셨습니다.

    예수님을 강권하여 모셔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할 때엔 이렇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 없이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거하시길 강권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삶의 주인 되심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합니다.

    마치 많은 무리들 속에서 바디매오가 예수님께 소리 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3) 예수님께서 축사의 떡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보는 것은, 우리의 능력만으론 안 됩니다.

    예수님의 축복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성찬은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일입니다.

    우리에겐 실로 너무나 큰 은혜입니다.

    성찬을 할 때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눈이 밝아져 그인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 지라”

    (눅24:31)

     

    예수님인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을 했던 제자들은 그 즉시 다른 제자들을 찾아 떠났습니다.

    이미 제자들에게 도착했을 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난 상태였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오늘날 부활하신 예수님은 직접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 교회는 참예수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전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

  • [복음메시지]스스로 괴롭게 하라(레 16:29~31)

    [복음메시지]스스로 괴롭게 하라(레 16:29~31)

      우리 교회는 현재 가을 특별 전도 집회를 앞두고 한달간 릴레이 금식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풍성한 전도집회를 준비하기 위함입니다. 주님 앞에서 합당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금식기도가 되기 위하여 오늘 말씀을 통해 금식기도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금식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레위기 16: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 말씀은 대속죄일에 관한 것입니다. 대속죄일은 온 민족이 자기의 죄를 생각하는 날이며, 대속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때 온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괴롭게 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매우 합당한 일입니다. 백성들은 가만히 있어도 자신의 죄가 사해지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 용서를 구하고 죄 용서를 받으려면 마땅히 죄에 대해 통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죄에 대해 뉘우치는 마음과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 괴로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죄 용서를 받는 자들의 당연한 태도 아닐까요?

     

    금식은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 8:21) “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 것과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스스로 괴롭게 한다는 것은 자기의 생명과 혼을 괴롭게 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스스로 겸비하여”라는 표현은 원문에서 “스스로 괴롭게 하여”로 해석됩니다. 금식은 자기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괴로운 일이 있고 간절한 일이 있기 때문에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다 함께 금식기도를 할 때에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십니다.

    (역대하 20:3) “여호사밧이 두려워하여 여호와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 공포하매“ 이 말씀에는 금식 가운데 하나님의 큰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모든 민족이 한 마음으로 금식하였고, 하나님의 응답이 나타났습니다.

    (역대하 20:15)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의 간절한 금식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던 이 내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강건한 마음과 뜻을 깨닫는 지혜를 주십니다.

    (삼하 12:16) “다윗이 그 아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되 금식하고 안에 들어가서 밤새도록 땅에 엎드렸으니.”

      다윗 왕은 인생에서 가장 큰 죄를 지었을 때 금식했습니다. 그는 충성된 종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가 그의 자녀에게 임했고,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 상황을 보고 다윗은 마음에 괴로움이 심하여 무려 7일을 금식했습니다. 하지만 금식 기도의 결과는 아이가 죽는 것이었습니다. 금식 기도가 능력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모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의 영성이 깊어지고 속 사람이 강건해졌습니다. 기도를 마쳤을 때 그의 속 사람이 매우 강건해져 그 일을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금식 기도의 열매입니다.

    금식의 올바른 태도는 하나님께 엎드리는 것입니다.

    (왕상 21:27~29)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하였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저가 내 앞에서 겸비함을 인하여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 그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 왕의 금식을 통해 금식의 바른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겸비함을 기쁘게 보셨음을 나타냅니다.

     

    금식기도를 통해서, 복음이 전세계에 전파되는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셨습니다.

    (행 13:1~3)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이라.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신약 시대에도 여러 번의 금식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교회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바울 사도의 세계 전도 여행이 시작되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은 사람의 계획이 아닌, 금식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섭리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라옵기는 우리 모든 분들이 금식기도의 올바른 자세와 능력을 깨닫고 이 일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음이 더해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글: 이현우 자매

    편집: 방태식 형제

  • [복음 메시지]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6:1~4)

    [복음 메시지] 이스라엘아 들으라! (신6:1~4)

     

     

    [말씀제목] 이스라엘아 들으라!

    [본문말씀] 신 6:1~4

    [설교자] 장병용 목자님

    [설교일]  2024/07/20 (토)

     

    Ⅰ. 배경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 6:4)

     신명기는 모세가 모압평지에서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3차례에 걸친 긴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법(율법)을 다시 상기시켜 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나눌 신명기 6장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Ⅱ. 내용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신 6:1)

    성경에 ‘명령과 규례와 법도’로 분류해서 기록했지만 쉽게 ‘하나님의 법(法)’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의 법이 담고 있는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법에는 하나님의 의(義)가 담겨 있습니다(창18:19).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 자체를 말하는 것인데, 성경에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었다고 쓰여 있습니다(창1:27). 형상의 진정한 의미는 겉으로 나타나는 육체적 외적 모습이 아니고, 육체를 벗고 난 후의 영적인 모습, 즉 ‘영적 외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외적 형상의 발현은 여러분이 보고 있는 저의 이 모습(육체적 외적 모습)입니다. 이 모습은 발현된 것이지 실체(영적 외적 모습)는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바울이 부활을 설명한 예시에서 실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밭에 뿌리는 씨 즉 알갱이가 땅속에서 썩어 없어지고 생명체인 싹으로 나오는 그것을 실체(형체)라고 하였습니다. 내 육체가 죽은 후 신령한 몸(육체적 외적 모습을 벗고 난 후의 영적 외적 모습)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속사람에 따라 선한 부활도 있고 악한 부활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적 모습을 하나님을 닮아가는 선한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이 ‘영적 내적 모습’ (히브리어로는 ‘데무트’)을 ‘모양’으로 번역하고 있고, 앞서 말씀드린 ‘영적 외적 모습’(히브리어로는 ‘쩨렘’)을 ‘형상’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창1:26; 5:3) (창5:1에서는 데무트인데 형상이라고 오역함.)

     

    의미

    히브리어

    한글 번역

    겉사람

    육체적 외적 모습

     

     

    속사람

    (부활체가 되면 드러남)

    영적 외적 모습

    쩨렘

    형상 (창1:26; 5:3)

    영적 내적 모습

    데무트

    모양 (창1:26; 5:3)

     

    ‘영적 내적 모습’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의 인격(personality)을 ‘지정의’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지(知,智)는 지식 및 지혜의 세계, 지적 요소, 즉 머리 부분에 해당됩니다. 정(情)은 정적 요소로 가슴 부분에 해당되고, 의(意)는 선택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意志)를 말합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의(義)를 하나님의 지정의로 구체화하여 설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정의는 완벽하여 ‘완전한 지정의’ 또는 ‘성숙한 지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담 하와에게 넣어 준 지정의와는 확연하게 구분됩니다. 인간에게 준 지정의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만들었지만 완전 단계에 이르지 않은 ‘미성숙한 지정의’입니다. 이는 비록 미성숙한 지정의이기는 하나, 죄가 있거나 악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어 선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정의를 닮아 가도록 하신 겁니다. 즉, 인간의 순종과 하나님의 역사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고자 함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니 성경에서는 두려워 할 것(경외,敬畏)과 자기를 돌아 볼 것(경건,敬虔)을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런데 미성숙한 지정의가 사탄의 영향(유혹)을 받아서 사탄의 씨앗이 인간에게 뿌려졌습니다. 그것이 ‘왜곡(歪曲)된 지정의’를 낳았습니다. 왜곡된 지정의는 ‘죄성(罪性)’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왜곡된 지정의는 우리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스럽지 않은 삶으로 이끄는 ‘죄(罪)’를 잉태하게 합니다 (약1:15).

    하나님께서는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하나님의 법 속에 담아 두고, 이것들을 축으로 하여 죄와 죄성을 해결하고, 의(義)를 성장시켜 하나님의 의를 인간 안에 풍성하게 담게 하십니다. 이 과정은 우리의 영적 내적 모습을 하나님의 모습으로 만들어 가기 위한 단계입니다. 오염된 우리를 돕기 위해 하나님의 영(靈)이 오셨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신앙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읽고 자녀들에게도 꾸준히 들려주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이뤄가는 것이 ‘성화(聖化)’입니다. 완벽한 지정의 즉 성경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완전한 지(知,智)’- 하나님의 옳고 그름에 대한 지식, 지혜에 대하여, 그리고 ‘완전한 정(情)’-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분노하시고 애통하심에 대하여, ‘완전한 의(意)’- 하나님이 언제 행동하시고 참으시는지에 대하여 잘 깨달아야 합니다.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신6:2)

     

    하나님께서는 2절 말씀을 왜 강조하셨을까요? 첫째는 나와 내 아들과 손자로 평생에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기 위한 것, 둘째는 우리에게 명한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 셋째는 우리를 장수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장수는 행복이 가득한 장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장수는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신 이유가 3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 6:3)

     

    제일 중요한 것은 ‘복’입니다. 구약 성경에 복은 주로 3가지 단어로 쓰여 있습니다 (참조:시128편). ‘바라크’(축복)가 있고, ‘에쉐르’(행복)가 있습니다. 3절의 복은 ‘토브’입니다. 토브는 창세기 1장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의 의미입니다. (창1:10,12,18,21,31)

    정리해 보면 ‘바라크’(축복)란 내가 구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지식, 총명, 재물 등 이지요. 그런데 그 축복이 항상 ‘에쉐르’(행복)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아 행복한 경우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불행으로 이어지는 상황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에쉐르’(행복)를 느끼며 살고 나를 돌아 보았을 때 ‘내 인생이 참 좋았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삶이 ‘토브’입니다.

    3절의 첫 부분에서 ‘삼가’라는 단어는 원문에 ‘울타리를 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이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잘 보관하고 그 보관된 말씀을 따라서 행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행복한 삶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좋고 아름다운 복을 하나님께서 주고자 하셔서 하나님 말씀을 행하고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참 좋았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통틀어 고찰해 보니 다음 두 가지로 요약이 됩니다(참조:시122편). 첫째 ‘평안(平安)’의 삶입니다. 마음이 평안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둘째는 ‘형통(亨通)’의 삶입니다. 즉 내 삶이 하나님 뜻에 맞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으로 순리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행복한 삶인 ‘평안과 형통’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명기에서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요약해 봅니다.

    첫째, 우리는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는 때마다 귀를 기울이고 듣고 그 말씀을 내 울타리 안에 간직해서 행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행할 때 한 번에 완벽하길 바라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완벽하게 행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속죄법(贖罪法)을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속죄법을 만든 것은 우리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는 사탄이 뿌린 씨앗, 즉 ‘왜곡된 지정의’가 있습니다. 누군가의 유혹을 받거나 약해지면 이 왜곡된 지정의가 작동하고 그것이 ‘죄’를 낳습니다. 우리의 신앙 삶은 이렇게 넘어지면서 일어나는 반복되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삶이 이뤄져야 합니다.

    영광과 비슷한 용어가 ‘자랑’입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칭찬도 자랑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고린도 전서 1장 31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의 원문에 따른 정확한 번역은 ‘자랑하는 자는 주를 자랑하라’입니다(렘9:23,24). 영광은 나중에 우리가 천국에 가면 하나님이 주십니다. 영광의 면류관(월계관)입니다.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 많을수록 많은 영광을 받을 것이고 적으면 조금 받겠지요!

    셋째,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부족하고 보잘것없는 우리를 세워주시고 현재의 모습을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지식, 재물 등 나눌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눌 때 나누는 그 손길이 하나님의 도(道)가 되고 하나님의 손이 되어 역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거룩하게 만들어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세계는 성령 안에서 의(義), 평안(平安), 희락(喜樂)입니다(롬14:17). 하나님께서는 기쁨이 충만되고 의가 충만된 그런 하나님 나라를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 공동체에서 이루어야 할 내용이고 천국에서 이루어질 내용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셨습니다. 신명기 6장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고자 굉장히 절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그 자체도 복이고, 더 나아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그 복을 향유할 수 있음이 하나님의 뜻이고 창조의 목적임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온 힘을 다하여 행하여서 하나님의 의를 우리 속에 이루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과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 [복음 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22:47~53)

    [복음 메시지] 이것까지 참으라 (눅22:47~53)

    제목 : 이것까지 참으라

    본문 : 누가복음 22장 47 ~ 53 절

     

    세상에서 나의 신앙보다 중요한 가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연약한 우리 인간은, 그것을 잊고  마귀에게 미혹 당하곤 합니다.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일보다 더 중요한게 있다고 미혹합니다.

     

    누가복음 22장 49~50절 말씀을 보면,

    무장을 한 이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옵니다. 이에 한 제자는 예수님께 다급히 묻습니다.

    “주님! 우리가 검으로 저 사람을 칠까요?”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이 있기도 전에 그 제자는 검으로 군사의 귀를 쳤습니다.

    당연히 그 제자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악인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우리의 신앙을 해하고자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계십니다.

    “이것까지 참으라!” (눅22:51)

    너의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이 되어도 참아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참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잡으러 온 군인을 치료해주는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제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태복음 26장 52절)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힘과 권력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악행에 대하여 힘으로 보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마음에 미움이 가득해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악한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성도들입니다.

    모든 상황속에서 우리는 인내할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우리를 위협하는 상황일지라도

    그것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는 힘에서 우리는 신앙이 점점 더 성숙해져 갈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감정이 악해지도록 미혹합니다.

    그리고 늘 우리 마음에 보복의 마음을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린 참을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실천해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한 마음을 해결해주시고

    평안함을 주실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12:17~21)

     

    예수님을 잡으러 온 이들은 마치 강도를 잡으러 오는것과 같이 온갖 무장을 하고 왔습니다.

    예수님이 강도인가요? 그들의 마음엔 악한 마음이 충만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낮이 아닌 밤에 찾아왔습니다.

    악행은 음지 즉, 어두운 곳에서 벌어집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늘 밝은 곳에서 거하고자 해야 합니다. 선행을 행함으로 빛을 내시기 바랍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계 13:8~10)

     

    성도 여러분!

    말세엔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상황들이 더 많아집니다. 우리는 인내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주님! 우리 성도들이 모든 상황에서 인내하고 참고 견딜 수 있도록 지켜주시길 원합니다.

     

    말씀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NJ57uLYylCE

  • [복음 메시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복음 메시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말씀제목]: 그런즉 깨어 있으라

    [증 거 자]:  목자 이요셉

    [증거일자]: 2024년 7월 20일 안식일 오전예배

    [본문말씀]: 마 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마 25;1)”

     

    본문의 말씀 중 신랑을 맞으러 나간 10명의 처녀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모든 성도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10명의 처녀가 다가오는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 곧 신랑과 함께 집으로 돌아 와서 성대한 혼인잔치를 열게 될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는 성도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풍성한 행복을 상징하는 표현들입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 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마 25:5~6)”

     

    10명의 처녀가 신랑을 맞으러 나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신랑이 오지 않았고, 밤에 신부가 졸며 자는 사이에 신랑이 도착하게 됩니다. 10명의 처녀 중에 5명의 처녀는 기름이 부족해서 불이 꺼져가고 있었고 기름을 사러 간 동안에 기름을 미리 예비한 5명의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였고 결국 문은 닫히고 말았습니다. 기름을 예비하지 못한 처녀들은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 했지요. 

     

    두 부류의 처녀들의 핵심적인 차이는 기름을 소유하고 있느냐, 있지 않으냐가 아닌 기름을 충분히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운 5명의 처녀는 기름 곧, 성령을 충만히 예비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로 자기의 통제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으로 채우고자 했던 자신의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성령의 소욕대로 그 사람이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대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행실이 다 하나님 앞에서 보기에 값진 말과 행실이 되며, 나의 말과 행동이 성령의 지배력 안에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영적인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지금과 같이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이적을 행하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 우리 앞에 오는 환난은 아주 무겁고 경험해 보지 못한 환난이기에. 믿는 자라 하더라도 미혹 받을 수 있으며 영적인 환란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낮이며, 밤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마 25;10)”

     

    천국은 예비 된 자들, 성령이 충분히 준비된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기도와 전도에 힘써 행하여 성령을 충분히 준비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록자: 이현우

    편집자: 방태식

  •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복음 메세지] 과부의 두 렙돈 (눅 21:1~4)

    제목 : 과부의 두 렙돈
    누가복음 21:1~4

    옛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어리석고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해도, 그들은 늘 예수님을 죽일 생각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며 안타까운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주시며 다시 마음을 돌이킬 기회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에수님을 걱정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때에,

    예수님을 감동시킨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오늘날 그 여인을 공개적으로 칭찬하고 격려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선 왜 과부를 칭찬하셨을까요?

    오늘은 그 이유를 알아보고 우리 모두 그 모습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오늘 성경에는 한 과부가 헌금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눅 21:1~2)

    헌금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내가 받은 은혜를 재물로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겁니다.

     

    가난한 과부가 아주 적은 금액의 헌금을 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헌금하는 모습과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 금액이 크든 작든 하나님께선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옛날의 과부는 오늘날의 과부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옛날의 과부는 절대로 경제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수입이 전혀 없는 신분이었습니다.

    따라서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부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돈의 단위인 렙돈은 ‘가장 적은 단위의 돈’ 입니다.

    이 시대에는 한 렙돈을 절대로 헌금하지 말라고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작 작은 단위의 돈이기 때문에 헌금으로써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과부는 한 렙돈이 아닌, 두 렙돈을 헌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도 헌금을 하고, 가난한 과부도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신가요?

    ‘가난한 과부가 많은 헌금을 하였다’ 고 말씀하셨다.

     

    (3) 심지어 이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모든 사람들 보다도 많이 헌금했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일반적인 생각을 해본다면 상식적이지 않은 말이다. 받은 만큼 돌려드리는 것이다.

    가난한 과부는 받은 은혜가 적기에 적은 금액을 헌금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분을 잘못 생각하면,

    “아!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만 좋아 하시는 구나” 라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의 적은 헌금을 칭찬 하셨을까?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본다면, 이 가난한 과부는 약 1달러가 되지 않는 금액을 헌금한 것이다.

    그런데 왜 칭찬을 받은 것일까?

     

    (4) 예수님께선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 다른이들은 풍족한 상황에서 헌금을 했고,

    가난한 과부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헌금을 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헌금을 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과부가 생활하기에도 부족한 상황속에서,

    예수님께 자신의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행동하게 했을까? 바로 그녀의 믿음이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예수님께 복을 구하면 구했지 자신의 전부를 드릴 생각은 못할 것입니다.

    그만큼 그녀는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실 것이란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선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과부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엘리사와 과부가 등장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의 공급이 중단 됐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선 엘리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그리고 엘리사는 그곳에서 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먹을것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 과부는 자기와 자기 아들이 먹을 것 밖에 남지 않았고,

    그것을 먹고 이제 삶을 끝내고자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엘리사는 하나님을 믿고 자신에게 그 음식을 줄 것을 권했습니다.

    과부는 믿음으로 그렇게 행동했고,

    놀랍게도 그 과부와 자식들이 여러날을 먹을 음식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여러분은 시간이 남아서 교회에 오십니까? 돈이 남아서 하나님께 헌금을 하십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어떤것이 중요한지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속에서 중요한 시간을 내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어려움 속에 있을수록,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때로 적은 능력과, 적은 축복을 주실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예수님의 큰 뜻이 있는 것이며, 큰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때마다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정 하실 때, 세상에서 보는 능력으로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자도 아니었고, 지식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었고,

    능력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지 않은것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 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르셨을때 모든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자세로 예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스스로 똑똑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것을 예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가난한 과부의 헌금”은,

    당시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에게 큰 충격과 가르침을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두 번째, 과부는 “전부”를 드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이들은 “일부”를 헌금했고, 과부는 “전부를” 헌금했습니다.

    즉, 이것은 최선을 다했는가? 나의 온 마음을 하나님꼐 드렸는가? 를 보고 계신 것입니다.

    과부에게 2개의 동전은 하루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돈이었습니다.

    자신의 하루, 자신의 삶을 전부 드린 것입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은 하나님 앞에 “일부” 를 바치고 있나요? 아니면 “전부”를 바치고 있나요?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여 예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부자들은 자신의 돈과 명예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가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가난한 과부처럼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손가락질 합니다.

    “저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다니!, 저것은 낭비다” 라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일까요?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을 바라볼 때 결과를 봅니다.

    잘 했는가? 결과물이 훌륭한가? 완벽했는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예배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frizeF92ahE

  • [복음메시지]내일의 희망을가졌나요?(예례미야 32:3~15)

    [복음메시지]내일의 희망을가졌나요?(예례미야 32:3~15)

    [말씀제목]  내일의 희망을 가졌나요? (렘 32:3~15)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4년 3월 2일

     

    (3) 이는 그가 예언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성을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리니 그가 취할 것이며 유다 왕 시드기야는 갈대아 인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바벨론 왕의 손에 붙이운 바 되리니 입이 입을 대하여 말하고 눈이 서로 볼 것이며 (4) 그가 시드기야를 바벨론으로 끌어가리니 시드기야가 나의 권고할 때까지 거기 있으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5) 너희가 갈대아 인과 싸울지라도 승리치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더니 유다 왕 시드기야가 가로되 네가 어찌 이같이 예언하였느뇨 하고 그를 가두었음이었더라 (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8) 여호와의 말씀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9) 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인봉하고 인봉치 않은 매매증서를 취하여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 땅에 있다는 것은, 부족함이 많고 흠결투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성도에게서 소망을 찾으시고, 즐거움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귀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남을 격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를 격려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하나님의 모든 관심이 나에게 있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자살을 생각하게 되지만, 같은 사람이 소망을 가지면 위대한 인물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언제든지 소망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소망이 있다면 무인도에서도 즐거울 수 있습니다. 심지어, 감옥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가운데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흙탕물 가운데서도 연꽃은 피웁니다. 우리도 연꽃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겠지요.

     본문은 희망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렘 32:1) 유다 왕 시드기야의 제십년 곧 느부갓네살의 제십팔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니라​​

     시드기야의 제 십 년에 하나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포위당한 지 오래되었을 때 이런 멸망의 예언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예언으로 인해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히게 되었지요.

    (렘 32:6) 예레미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였느니라 이르시기를

    (렘 32:7) 보라 네 숙부 살룸의 아들 하나멜이 네게 와서 말하기를 너는 아나돗에 있는 내 밭을 사라 이 기업을 무를 권리가 네게 있느니라 하리라 하시더니​

    (렘 32:8) 여호와의 말씀 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하나멜은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게 되었기 때문에 땅을 팔았습니다. 

     

    (렘 32:9~15) (9)내 숙부의 아들 하나멜의 아나돗에 있는 밭을 사는데 은 십칠 세겔을 달아 주되 (10) 증서를 써서 인봉하고 증인을 세우고 은을 저울에 달아 주고 (11) 법과 규례대로 인봉하고 인봉치 아니한 매매 증서를 내가 취하여 (12)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과 매매 증서에 인 친 증인의 앞과 시위대 뜰에 앉은 유다 모든 사람 앞에서 그 매매 증서를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바룩에게 부치며​ (13) 그들의 앞에서 바룩에게 명하여 이르되 (14)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이 증서 곧 인봉하고 인봉치 않은 매매증서를 취하여 토기에 담아 많은 날 동안 보존케 하라 (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

     본문은 소망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소망의 교훈

     1.소망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계산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멜은 ‘너를 위하여’ 밭을 사라고 했지만, 정말 그는 예레미야를 위해서 파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멸망당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멜의 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밭을 샀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첫째로, 하나멜을 돕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몰라서 속은 것이 아니었지요. 살기가 어려워도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나 살 궁리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더 어렵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백성임을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살기가 어려워도, 더 어려운 사람을 돌보려고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까지 돌아봐 주실 것입니다. 내 것을 힘써 나누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나만 잘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 외면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멜의 삶이 아니라 예레미야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2.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렘 32:8) 여호와의 말씀같이 나의 숙부의 아들 하나멜이 시위대 뜰 안 내게로 와서 이르되 청하노니 너는 베냐민 땅 아나돗에 있는 나의 밭을 사라 기업의 상속권이 네게 있고 무를 권리가 네게 있으니 너를 위하여 사라 하는지라 내가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인 줄 알았으므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워 살았습니다. 이것이 그가 희망을 잃지 않은 이유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멸망할 나라의 땅을 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예레미야는 오해받을 각오를 하고 그 땅을 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레미야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에 순종하려는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을 보시고 하늘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큰 축복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

     3. 내일에 대한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됩니다.​

    (렘 32:15)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 내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이 이 땅에서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사게 되리라 하셨다 하니라

    ​​ 어떤 상황 속에서라도 내일의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 명령하셨습니까? 왜 예레미야는 명령에 순종하였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예레미야에게 땅 매매를 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하겠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시리라고 말씀하신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절망할 거라면, 왜 하나님을 믿는 것일까요? 어려운 순간에 희망을 놓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축복이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 보약이 되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늘의 별​이 멀리 있을 때 아름다운 것과도 같지요. 축복도 오랜 고통의 시간 후에 오는 축복이 내게 더 축복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눈앞의 축복만 진짜 축복은 아닙니다. 바위틈에서 자란 소나무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에게 시련이 있어야 튼튼한 뿌리가 형성됩니다. 시련은 뿌리를 내리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희망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삶에 어려움과 고통이 온다고 삶을 포기하는 이유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꿈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꿈이 미완성이기에 자신을 독려하게 됩니다. 꿈을 다 이룬 후의 삶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무기력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므로 우리에게 희망이 중요합니다. 희망을 품고 노력하는 사람이 더 아름답고, 그의 삶이 더 힘찬 것입니다. 희망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꿈이 없는 것이 비극적인 일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참된 소망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쇠똥구리는 은하수를 보고 길을 찾아갑니다. 땅에서 똥을 굴려도 그 눈은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소망의 근원은 하나님뿐이십니다. 연이 연줄에 매여있을 때가 행복하겠습니까, 연줄이 끊어져 하늘로 날아갈 때가 행복하겠습니까? 연줄이 끊어지면 연이 날지 못합니다. 바로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매여있는 것을 속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연결된 끈이 있어야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매여있지 않으면 사람도 땅에 처박히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연결되어야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연줄을 끊어버리면 그 연은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바로 땅에 곤두박질치게 될 것입니다.

    (시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그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우리는 소망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손을 붙들고, 하늘을 바라보고 소망을 노래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복음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복음메시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말씀 제목]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 (누가복음 18:15~17)

    [설교자] 전홍희 목자

    [설교일] 2024년 2월 17일 안식일 오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스스로 잘난체 하고, 자기를 높이는 사람들에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선 제자들에게 “과부처럼 기도하라”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겸손하게 기도하라” 라고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눅18: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당시 이스라엘엔 유명한 랍비들에게 자녀들을 데려가 축복기도를 요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시대에 유명한 랍비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아이들을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런 이들을 꾸짖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이들이 모이면 시끄럽고 정신이 없을 수 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상황이 예수님께

    닥치지 않도록 사람들을 꾸짖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행동이었을 뿐입니다.

     

    (눅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어린아이”는 7세 미만의 아이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지식도 많고,

    가진것도 많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가진것이 많을 수록 예수님을 가까이 두기 어렵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것들이 예수님을 가까이 하는데 장애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선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7세 이하의 어린이들 보십시오. 이 아이들은 온전히 자기 부모님께 의지합니다. 그리고 매순간 부모님만 찾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이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불안해 하지요.

    우리도 이런 아이들처럼 예수님을 항상 의지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 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느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 3가지 의미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1.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창12:1~4)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새로운 땅으로 가라는 말씀에 주저함 없이 순종하였습니다.

    전혀 모르는 땅임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모든 식구를 데리고 이사를 갔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미음이 중요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입니다.

    그렇지만 신앙안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하고, 나의 걱정과 나의 생각이 첨가됩니다.

    성도님들은 천국이 있다고 믿으십니까? 천국은 분명히 있습니다!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있는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2.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민수기14:6~8)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방인들의 모습을 보고 전혀 두려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겁을 먹고 말았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땅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 말씀을 순수하게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각으로는 이 모든 일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불가능한 일이 있을까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히,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베드로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능한 어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베드로에게,

    아무런 어업관련 경험이 없는 예수님께서 깊은곳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여, 깊은곳에 가서 그물을 던졌습니다.

    결과는 어땠나요?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은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천국이 가까이 있는 것을 믿습니다.

     

    3.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찾아라 (요3:5~6, 9~10)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최고의회인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를 꾸짖었을 때, 니고데모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높은 직책에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떠나 산다면 낙오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처럼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가져서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말씀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viUbGkdFJ6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