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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남겨두심과 지키심(요 17:15)

    [복음메시지] 남겨두심과 지키심(요 17:15)

    [말씀제목]  남겨두심과 지키심(요 17:15)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3년 4월 21일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

     주님께서는 이들을 위해 다른 것을 구하시지 않으셨다.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기도하셨다. 이 ‘보전함’은 주님께 중요한 문제였다. ​

    (요 17: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요 17: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보전한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다. ‘보호하다, 간수하다, 지키다’ 라는 의미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온전하게 잘 지키는 것이다. 변질되지 않도록, 상하지 않도록, 흠이 생기지 않도록 잘 지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 이것을 기도하셨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그들을 지켜달라고 요청하셨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다르다. 세상에 속해있지 않다. 정신 구조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사고방식이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미워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삶이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구하셨다. 어떤 악이 나타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달라고 간구하시는가?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 남겨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보전해달라는 간구와 모순된 것이 아닌가? 악한 자에게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세상에서 저희를 데려가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어째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하늘에 들림받지 않는 것인가? 왜 완벽해지지 않는 것인가?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받게 하시는 것인가?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이유

    1.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도 데려가주시기를 간구한 사람들이 있었다. 모세, 엘리야, 요나 같은 사람이다. 세 사람 모두 하나님께 데려가주시기를 구했다. 

    ​(욘 4:3)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욘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민 11: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다. 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셨는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다. 안전만을 생각한다면, 그들을 데려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데려가시지 않으신 이유는 그들이 이땅에서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 세상을 떠난다면 누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겠는가?

    ​(요 17: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으시다. 이땅에서 할 일이 있다. 제자들이 가버리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세상에서 어떤 메세지를 전해야 하는지 알려주셨다. 예수님을 드러내야 함을 알려주신 것이다. 즉, 우리는 주님께서 이땅에 남겨주신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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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삶은 우리가 완전해지기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온전해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완전해져야 한다. 우리에게 점진적 변화가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세상에 남겨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실패와 고난으로 겸손하게 하신다.

    ​​(고후 12: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언제든지 교만해질 수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느끼게 하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인정했다.

    ​(고후 12: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연단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보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으로 만들고자 하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발전 과정 중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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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훈

    1. 우리를 세상에서 떠나게 하는 모든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계획과 다르다. 자살은 정말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 백성은 절대 이런 결정을 해서는 안 된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는 큰 허무함 속에 사로잡혔다. 자기의 삶이 부정당하는 일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래도 엘리야는 스스로 죽지 않았다. 하나님께 데려가주시기를 간구했다. 설령 자살 생각이 들 때에도, 스스로 생명을 거두어가는 선택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시지 않으심을 기억해야 한다. 자살은 어떤 방식에서라도 잘못된 것이다. 차라리 엘리야처럼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이 좋다. 자살은 성도의 선택에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자살뿐 아니라, 세상에서 떠나려는 모든 시도가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자연인처럼 속세에서 떠나거나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와 의미적으로 반대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배운 진리를 회피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삶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견디는 것이다.

    ​(약 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자기를 지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은둔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 일을 하면서, 우리를 세상에 물들지 않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땅에 남겨두신 이유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바이다. 우리가 세상 안에 있어도 우리는 세상에 물들지 않게 우리를 지킬 수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를 세상에 물들지 않게 지켜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떠나려 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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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절대 불평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이지 않아도 시련 속에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하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우리를 그 상황에 넣으셨음을 믿어야 한다. 제자들도 그것을 위해 남기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내가 만나는 환경, 상황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불평해서는 안 된다. 왜 이런 상황을 만나게 하셨냐고 불평한다면,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해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로 불평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 만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상황 속에 나를 넣어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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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해야 한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두시는 이유는, 그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만한 일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상황 속에서 불평하거나 불만을 품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그렇게 살다가 무너지더라도, 우리 삶은 실패한 삶은 아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해야만 한다. 감사하며 살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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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이것을 세상에서 받은 가장 큰 특권처럼 기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예수님의 대변자로 삼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완수하라고 이 땅에 자신을 남겨주셨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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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확신하신다. 우리를 보존하여 지키시는 아버지의 능력에 대해 확신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를 부족함 없이 주님을 섬기게 하시기를, 주님의 영광을 항상 드러내게 하시기를 기도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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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세지]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말씀 제목] 십자가 주변의 인물(6)-예수와 동행한 여인들(눅8:1-3, 마27:55-56, 막15:40-41)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3년4월8일

    우리는 구약 성경 속에 등장하는 믿음의 인물들 가운데 가끔 여인들의 이름을 발견하곤 한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 사사 시대를 이끌었던 여자 사사 드보라, 서원 기도를 통해 사무엘을 낳은 여인 한나, 시어머니를 위해 희생한 모압 여인 룻, 민족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목숨을 걸었던 황후 에스더 등 믿음의 여인들이 있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신앙인들에게 잔잔한 교훈을 전달하는 소박한 믿음의 여인들도 있다. 엘리야 선지자를 접대한 사르밧 과부, 엘리사 선지자를 위해 섬세히 배려한 수넴 여인,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가 병이 낫게 만든 한 이름 없는 소녀 등 이렇게 성경에서는 믿음을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여인들이 발견된다.

    십자가 사건이 있었던 그 때 그 현장에도 여인들이 있었다. 오늘은 십자가 현장의 인물 가운데 주님을 따르고 섬겼고 동행했던 여인들의 족적을 살펴보고 그녀들의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인지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사시는 기간 동안 그 분 곁에서 섬기는 여인들이 있었다. 누가는 당시 사회적 약자이지만 믿음의 주역인 여인들에 대한 관심이 깊었다. 그래서 마태나 마가와는 달리 여인들의 이름을 나열할 정도로 그 여인들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었다.

    (눅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예수님의 곁에는 열 두 제자 뿐만 아니라 섬기는 여인들도 있었다. 그 여인들 중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여인은 바로 일곱 귀신이 들렸다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였다. 그리고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라는 여인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여자들도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여자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일까?

    (막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우리는 마가복음 16장에서 또 다른 여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야고보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여인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주변에는 상당히 많은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기고 있었다. 섬기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그러면 이 여인들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교훈하고 있는가?

    첫째,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모범.  

    (막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누가복음 8장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16장에도 막달라 마리아가 첫 이름으로 등장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처음으로 모습을 보이신 사람이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었고, 예수님이 그녀를 치료해 주셨다. 그 은혜를 잊을 수 없어서 그녀는 주를 섬겼고 그 섬김은 주님이 죽으신 이후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막달라 마리아 외에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여인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 일행을 섬기기 시작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 바로 이 여인들의 봉사와 섬김의 이유는 주님께 은혜를 입었고, 그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고, 감사했고 봉사와 섬김의 열매로 나타냈던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관심을 두시는 열매이기도 하다.

    (눅 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언젠가 예수님이 열 명의 문둥병자를 치유해 주었을 때 그 중 한 사마리아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하다고 말했다. 또한, 귀신을 쫓아내어준 사람은 여럿 있었다.이렇게 여러 사람이 은혜를 입었지만 지속적으로 주님 곁에서 봉사와 섬김의 삶을 실천한 인물이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감사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은혜 입으면 주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교회 중에 손님 접대로 섬김의 믿음을 실천하는 장로님 내외 분이 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남편인 장로님은 젊었을 때 아내가 대만 손님을 지극히 섬기는 모습을 못 마땅히 여겼다. 또 회당 건축할 때 거금의 헌금을 한 것을 알고 더욱 못마땅해 했다. 그런데 장로님 부부가 대만을 방문해서 귀빈 대접을 받고는 그들의 섬김에 매우 감동했다. 그 섬김의 모습에 감동해서 장로님도 사모님처럼 손님 접대에 섬김을 다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는 한국에 가면 모 장로님을 꼭 찾으라고 소문이 나기도 했다.

    섬기는 일에는 돈, 체력, 시간이 소모된다. 모든 수고와 비용을 상쇄하고도 남는 감사와 즐거움과 기쁨이 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예수님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계시는지? 그리고 그 감사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고 계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수행하는 여러 봉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낼 수 있다. 형태는 어찌되었건 항상 주님께 구원에 대한 감사의 열매를 나타내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롬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둘째, 주님의 십자가에 동행하는 모범.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님의 곁에서 가장 가까운 자로 자처했던 12 제자들은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모두 그분을 떠나갔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지실 때 울며 골고다의 현장까지 동행한 여인들이 있었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셔서 백성들의 주목을 받는 순간에도 십자가에서 가장 비참한 일을 당하는 순간에도 이 여인들은 주님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성경은 그 상황에서 여인들이 나타낸 슬픔의 표현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눅 23:27-28)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 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수난의 길을 좇아간 자들은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이동하신 길에도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순간에도 그 곁을 떠나지 않고 동행한 여인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신앙의 모범을 전달하고 있는가? 일반적인 사람들은 밝고 기쁘고 행복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프고 불행한 일에는 동행하길 원하지 않는다. 마음이 슬퍼지고 어둡고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신앙의 길은 바로 십자가와 동행하는 길이다. 그래서 성도가 슬픈 자들의 슬픔에 동참하고 아픈 자들의 아픔에 동참할 줄 알기를 원하신다. 이 여인들이 십자가와 동행한 모습은 바로 그런 믿음의 모범을 남기고 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디 주님의 기쁨과 희락 뿐만 아니라 주님의 슬픔과 아픔에도  동참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란다.

    (롬 12:15-16) 『[15]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셋째, 복음 전파 사역에 참여하는 모범. 

    (요 20:18-19)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부활하셔서 최초로 모습을 나타낸 사람이 누구였는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라는 여인이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너무 감사해서 항상 주님을 따라다니며 섬겼던 여인, 그랬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님은 부활하신 당신의 모습을 가장 먼저 나타내셨고, 마리아는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했다.

    누군가 내게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그 감사를 표현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어서 눈앞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기리고 감사한다면 더 아름다운 일이다. 다윗 왕은 죽은 친구 요나단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그 아들 므비보셋에게 호의를 베풀지 않는가?

    하나님은 이런 성품의 사람을 사랑하신다. 또 성도가 모두 그런 신앙을 나타내기를 기대하신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다. 십자가 사건은 이미 이천년 전 사건이고 내가 세례 받은 사건도 이미 수년 전 사건이지만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고 항상 그 은혜의 감동 속에서 사는 것 이 또한, 감사의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감사에 합당한 믿음을 나타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그녀는 다른 여인들과 더불어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복음 전파자의 삶을 살게 된다.

    (행 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사도행전에는 이름은 없고 그저 여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의 다락방에서 모여 기도하던 그 여자들 안에 주님을 섬기던 여인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성령 강림을 준비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에도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십자가의 현장에 있었던 여인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구원에 은혜에 대해 섬김의 삶으로 화답할 줄 아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고통과 슬픔과 아픔의 처지에 있는 성도들과 동행해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우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은사와 형편대로 복음 전파의 사역에 참여하고 협력하고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했던 그 여인들의 믿음의 길을 좇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BGpIMX0VsMs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 [복음메시지]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복음메시지] 서로 사랑하라 (요 13:34-35)

    [말씀제목]  서로 사랑하라

    [설교자] 정호민 목자님

    [설교일] 2023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 예배

     

    [본문말씀] 요 13:34-3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왜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1.  사랑은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하십니다.

     

    2.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일방적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일 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3.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요일 4: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하라..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으로 우리의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할까요?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1.  나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랑

    (요 13:4-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이신, 선생이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있습니다.

     

    2.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나의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가운데 그만하고 싶고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힘들다고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3. 대상을 초월한 사랑

    예수님께서 발을 씻겨준 제자들 중에는 예수를 팔고자 마음 먹은 가룟유다도 있었습니다.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고자 한 가룟유다의 마음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음이 맞지 않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비교적 쉽지만 나와 맞지 않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룟유다를 사랑하신 것을 생각하며 그 또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저희가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핍박하고 십자가로 내몰은 사람들을 위해 원망이 아닌 그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그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 어떤 결과가 있을까요?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의 제자임을 증명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더 큰 우리를 이루고자 하십니다.

     

    (벧전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바라옵기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 나누기에 힘쓰는 모든 성도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 [복음메시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삼상 2:27-36)

    [복음메시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삼상 2:27-36)

    2023년 04월 18일 (화) 저녁예배

    [설교제목] :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본문말씀] : 사무엘상 2장 27절~36절

    [설교자] : 박은진 목자님

     

    사무엘상을 통해 알 수 있는 주제는 크게 2가지다.

    1.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세우시는가?

     하나님 나라 = 교회

    2. 하나님 나라의 일꾼을 어떻게 세우시는가?

     1) 왕 2) 제사장 3) 선지자

     

    (27) ‘하나님의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그를 택하여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고후 1:20)
    하나님께서는 한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다. 그러나 본문말씀의 3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거두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약속을 철회하셨는가?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30)

    그 이유는 엘리 가문에 문제가 있기에 축복의 약속을 받을만한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죄의 보응을 치르시는 분이시다.

     

    ◈ 엘리 가문이 받게 될 죄값

    1. 늙을 때까지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일꾼이 없을 것이다. (31)

    2. 가문의 사람들이 죄의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33-34)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 그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더니 하나님의 궤 빼앗긴 것과 그 시부와 남편의 죽은 소문을 듣고 갑자기 아파서 몸을 구푸려 해산하고 죽어갈 때에 곁에 섰던 여인들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아들을 낳았다 하되 그가 대답지도 아니하며 관념치도 아니하고 (삼상 4:17-19)

    3. 구걸하다시피 제사장 직분을 이어갈 것이다. (36)

    네 집에 남은 사람이 각기 와서 은 한 조각과 떡 한 덩이를 위하여 그에게 엎드려 가로되 청하노니 내게 한 제사장의 직분을 맡겨 나로 떡 조각을 먹게 하소서 하리라 하셨다 하니라 (36)

    (삼상 4:20-21)

     

    ◈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베푸신 은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27-28)

    1.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27)

    2. 존귀한 제사장의 직분을 주셨다. (27)

    3. 제사장의 분깃을 얻게 하셨다. (28)

     

    ◈ 엘리가문의 죄악 (29)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 (29)

    1.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였다.

    2.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귀하게 여겼다.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귀하게 여긴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지 않은 행위다.

    부모로서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된다는 것이다.

    (출 20:5)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이시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다.

    (마 22:37)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할 때 먼저 생각하라고 하셨다.

    (마 10:37)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이 아니다.

    3. 하나님께 드린 것을 빼앗았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꾼을 세우심으로 엘리 가문을 심판하신다. (35-36)

    그 새로운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했다.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삼상 3:10)

    하나님의 마음과 뜻대로 행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일꾼상에 걸맞는 태도이다.

    (행 13:22) 다윗도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 뜻에 합당했기 때문에 귀하게 쓰임받았다.

    (눅 1:38) 마리아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했다.

    (눅 5:5)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5)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 : 마쉬아흐 = 메시아

    (히 6:20) 우리는 대제사장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제사장으로 쓰임 받아야 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나라, 왕같은 제사장으로 불러주셨다.

    하나님 나라의 일꾼은 자기 생각과 주장이 강해서는 안된다. 서로를 이해하며 양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가장 충실한 일꾼, 즉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유튜브 예배링크

  • [복음메시지] 70인을 보내시다 (눅10:1~15)

    [복음메시지] 70인을 보내시다 (눅10:1~15)

    [말씀제목] 70인을 보내시다 (눅10:1~15)

    [설교자] 전홍희 목자

    [설교일] 2023년 4월 15일(토) 안식일 예배

    그 후에 주께서 따로 칠십 인을 세우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시며 (눅10:1)

     

    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작품이죠.

    어느 겨울, 저는 길을 지나다가 미용실에 아름다운 꽃들이 활짝 피어있는것을 보게 됐습니다.

    어떻게 겨울에 꽃이 활짝 피어있을 수 있었을까? 너무 궁금하여,

    미용실로 들어가 주인에게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미용실 주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내가 따뜻하기 때문에 겨울이 되어도 꽃이 필것이라 생각했다고 말이죠.

    그러나 꽃은 피지 않았습니다. 이후 식물박사를 만나게 되어, 이 일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박사님이 식물의 놀라운 비밀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꽃이 피기 위해선, 밖에서 서리를 맞을 때 까지 기다려야 하며,

    서리를 맞은 이후에 실내로 들이면 꽃이 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꽃은 서시를 맞으면 본능적으로 겨울이 지나 봄이 왔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시련이 있은 후에 꽃을 피울 수 있구나’ 라는 교훈을 얻게 됐죠.

     

    우리 역시 이 세상을 살아갈때 힘들고 아픈일이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법칙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선,

    이러한 시련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 가운데 우리는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복음’은 이 세상의 어떠한 가치보다도 높고 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이런 선한일에 앞장서는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까요?

    70인을 파송하시는 오늘의 본문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내가 복음전파 하려는 곳은, 주님께서 가실 길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즉, 복음전파는 나 혼자가 아닌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인데요.

    그 영혼을 구하기 위해 주와 함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전도는 절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며, 주께서 하시는 일이며 단지 우리는 그 도구에 불과합니다.

    본문에서는 두 사람을 짝지어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서로 격려 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동역자를 보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일꾼이 부족함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의 동역자를 보내주시길 기도드려야 합니다.

    수많은 영혼들에겐, 수없이 많은 각자의 처지와 사연이 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설득력있게 전달되기에 적합한 다양한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이죠.

    나 혼자서 모든것을 다 할 수 있다는것 보다,

    믿음의 동역자를 보내주시길 기도드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결코 쉬운일도 아니기 때문이죠.

     

    세 번째, 현실을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접하게 됩니다.

    현실을 직시하고 있어야만, 그 가운데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선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만큼 전하는 일은, 힘들고 두려운 상황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인데요..

    오히려, 세상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만 하고 상처 받을 일도 생길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선 뱀과 같이 지혜로우되,

    비둘기처럼 순결한 마음을 지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네 번째, 전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방법을 소개하고 계신데, 이를 믿고 행해야겠습니다.

    1) (눅10:4~8)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내가 세상적으로 필요한것을 찾고 준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해야할 일이 있을 때 믿음으로 곧장 해야 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2) (눅10:4) 목적에 충실하라.

    *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

    당시 팔레스타인들의 특징은, 오랜만에 문안을 하면 30분씩 서로의 근황을 얘기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문안하다보면, 본래의 전도 목적을 잊게 될 것입니다.

    * 주는것을 먹고 마시라

    음식이나 대접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가면,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이 많아져

    복음전파의 본 목적을 잊게 됩니다.

    * 옮기지 말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면 서로를 비교하게 된다. 대접받는 것이 중요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로인해 복음전파에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돋보기가 한 곳에 집중했을 때 힘을 발하듯 목적에 집중해야 합니다.

    * 복음 전파할 때, 결과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성을 다해 복음을 전파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로 인해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전한다 해도

    마음을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너무나 소중하며 세상의 어떤것보다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를 대사로 여기고 계십니다.

    때문에 주께선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죠.

    믿음을 가지고, 전할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께서 늘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글 작성자 : 안희수 형제

    (유튜브 예배링크)

  • [교회행사] 광주교회 봄 영은회

    [교회행사] 광주교회 봄 영은회

    할렐루야! 광주교회에는 3월 10일부터 12일까지 봄영은회가 있었습니다.

    전국 교회들 중에 가장 처음으로 영은회를 개최하였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모든 시간을 은혜롭게 보냈습니다.

     

    이번 영은회는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19-20)라는 주제로 이요셉 목자님께서 말씀을 선포해주셨습니다.

     

    영은회 일정입니다.

    금요일 저녁예배 : 하나님 나라는 능력에 있음이라

    토요일 새벽예배 : 다니엘의 기도(1)

    토요일 오전예배 : 엘리야의 준비

    토요일 오후예배 : 교회는 어떤 곳일까? (구도자예배)

    토요일 저녁예배 : 우리를 보라

    일요일 새벽예배 : 다니엘의 기도(2)

    일요일 오전예배1 :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

    일요일 오전예배2 : 성찬례

     

    영은회를 위해서 영은회 전 한달간 성도님들의 릴레이 금식기도가 있었고 일주인간 영은회를 위한 특별기도회 기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영은회를 준비하는 과정부터 영은회를 마치는 순간까지 정말 많은 섬김이 있었습니다.

     

    예배 때마다 아동부, 악기부, 성가대에서 특송이 있었고 특별히 일요일 오전예배 때에는 전남연합 청년부에서 ‘성도의 삶’이라는 곡으로 특송이 있었습니다.

     

    이번 영은회를 통해 들은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 그 말씀을 통해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교회는 사람의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기도로 간구하는 광주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모든 시간 은혜롭게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 돌립니다.

  • [성도소개] 광주교회 황광식 집사님을 소개합니다

    [성도소개] 광주교회 황광식 집사님을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광주교회 황광식 집사님을 소개합니다!

     

     

    Q. 간단한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저는 광주교회 황광식 집사입니다.

     

    Q.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

    A. 저는 어머니 복중에 있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태신앙입니다. 어릴적 시골에 살 때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를 다녔는데 성장 하고서야 다니던 교회가 그리스도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도시로 이사를 와서 장로 교회를 다녔습니다. 제가 중학교 진학 후 시골에 살고 계시던 외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적이 있는데 부모님과 한참 이야기 하시고는 가셨습니다. 이야기인즉 “참예수교회에 진리가 있다. 당장 진리를 받아들이기가 힘들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장소를 제공해주면 좋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한번, 두 번 참예수교회 예배에 참석 하시고나서 ‘여기에 참 진리가 있다’로 하여 가족 전체가 집회에 참석하면서 우리집이 집회소가 되었고 지금의 광주교회 시발점이 되었고 저 또한 참예수교회 신도가 되었습니다.

     

    Q. 신앙 생활 중 큰 기쁨, 행복을 누린 적이 있다면 언제? 어느 때?

    A. 신앙 생활 중 가장 큰 기쁨은 지금의 터에 교회를 건축하였다는 것입니다. 목자님을 포함한 성도님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게 감사를 드립니다. 또 믿음 안에서 반려자를 만나 결혼을 하였고 또한 믿음 안에서 자녀가 따라 교회의 일꾼으로 성장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며 이것이 신앙 안에서 행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Q. 믿음의 목표 또는 믿음 안에서 꿈이 있다면?

    A.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하나님 나라의 푯대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의 미래 세대가 믿음이 성장하여 나가는 광주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끝으로 믿음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세상으로 나간 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분들이 하나님 품으로 다시 돌아와 회개와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그 날이 속히 오길 간구와 기도를 드립니다.

  • [기관소개] 광주교회 대학부

    [기관소개] 광주교회 대학부

    할렐루야! 광주교회 대학부를 소개합니다!

     

    2023년 광주교회 대학부의 목표는 ‘모이자 하나되자’입니다!

     

    (히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대학부 인원은 대학부장까지 총 8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평일에는 각자의 생활로 바쁘고 지칠텐데도 안식일에 아동부 교사, 학생부 교사로 아이들을 섬기며, 열심히 주의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찬양인도, 반주, 방송사역, 악기연주 등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 안식일 일정에 따라 안식일 저녁, 또는 일요일, 또는 평일에 시간을 내서 모여 교제시간을 가지며 말씀과 같이 모이기에 힘쓰고 하나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기쁨으로 주님의 일에 힘쓰며 사랑으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광주교회 대학부가 되길 소망합니다!

     

  • [복음메시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교회 (히 12:1-3)

    [복음메시지] 믿음으로 나아가는 교회 (히 12:1-3)

    [말씀제목]  믿음으로 나아가는 교회

    [설교자] 정호민 목자님

    [설교일] 2023년 1월 7일 (토) 안식일 오전 예배

     

    [본문말씀] : 히 12:1-3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성경을 보면 믿음의 여정, 믿음의 경주를 종종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고전 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너희가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라…

    달리기에는 상이 있는데 이 상은 (계 21:7)을 보면 이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유업,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한 자에게는 하늘나라의 유업, 상을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믿음의 경주을 완주하고 승리해서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나라의 유업을 상으로 받을 수 있을까요?

     

    1. 무겁고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야 한다.

    많은 짐을 들고 있는 사람은 경주에서 이기는 것 뿐만 아니라 완주하는 것도 힘들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경주를 승리하기 위해서는 나를 무겁게 하고 얽매이게 하는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라는 단어의 원어를 보시면 ‘표적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에서 죄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이유는 하나님을 위한 삶이 아니라 나에게 유익과 영광이 되는 삶을 선택할 때 죄를 범하게 됩니다.

     

    (딤후 2: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말씀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면류관을 얻을 수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경주 가운데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는 것, 즉 죄를 조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 중심에 하나님이 사라지고 내 욕심이 자리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된다면 우리는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가운데 방향성을 잃어버리고 잘못된 곳으로 달려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마음, 나의 중심을 잘 들여다봐야 합니다.

    내 중심에는 무엇이 있는지.. 내가 짊어지고 있는 죄가 있지 않는가..

     

     

    2. 인내로 경주해야 한다.

    믿음의 경주는 마라톤보다도 훨씬 더 멀리 가야합니다. 적어도 마라톤은 정해진 길이가 있지만 우리가 달려갈 믿음의 경주는 언제 끝날지 모르니 계속 달려가야 합니다.

    또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는 가운데 내 발목을 잡는 많은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눅 21:17-19) 17) 또 너희가 내 이믕르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난과 핍박을 끝까지 견디고 인내하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3. 예수를 바라보며 예수를 생각해야 한다.

    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 그 너머에는 눈앞에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난을 참으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시 42: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고난과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또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우리를 위해 먼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에게 어떤 고난이 오는 순간에도 우리는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를 생각하는 성도 되길 소망합니다.

  • [성도간증]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천안교회 유정아 자매)

    [성도간증]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 (천안교회 유정아 자매)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저희 가족 구성원은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저까지 3명입니다. 잦은 업무로 인해 바쁘셨던 아버지였기에 어려서부터 할머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할머니는 저의 엄마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당시 이모할머니(대방교회 서정임)께서는 할머니를 전도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주말에도 일을 나가시거나, 일이 없는 날에는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셨고, 남은 저는 할머니와 시장 구경을 가거나 할머니들의 수다 모임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친구였던 할머니가 없자 토요일은 제게 너무나도 심심했습니다. 하루는 심심한 나머지 ‘그냥 한 번만 따라갔다 와볼까?’라는 생각에 할머니께 나도 데려가라, 따라가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이모할머니를 만나 셋이 함께 천안교회에 도착했습니다. 천안교회에 대한 첫인상은 엄청난 환영이었습니다. 교회에 도착한 뒤부터 집으로 갈 때까지 엄청난 환대와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다음주 안식일이 찾아왔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빈둥거리며 누워있는 저에게 “정아, 교회 갈 준비 안 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냥 딱 한 번만 다녀올 생각이었는데, 당연하단 듯 준비하라는 할머니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지만, 왜 그랬는지 저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교회 갈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사실 저의 성격은 줏대 없이 누군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 그냥 흘러가듯 사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이심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신앙생활을 이어가던 중, 2018년 8월 2일 할머니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하나님께로 가셨고, 남겨진 아버지는 절망을 표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저에게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끼셨습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눈물이 많으면서 왜 할머니의 장례식엔 울지 않냐며 이해하지 못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제가 태어나기 전부터 가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고, 가장이 아님에도 가장처럼 늘 가족을 챙겨오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례식장에 얼굴도 비추지 않았던 몇 명의 가족들과, 어려서부터 저를 키우시고 보살펴주셨던 할머니인데 그에 비해 울지 않는 저에게 많은 서운함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물론 저도 당시 할머니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슬프긴 하였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생각으로, 안도와 평안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렇게 슬픔보단 평안의 마음이 클 수 있었던 이유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는 당시에 할머니에 비해 기도 생활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고, 또 매일 밤 자기전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하시는 할머니와 달리, 저는 아버지의 눈치를 보며 마치 ‘나는 이렇게 기도 안 하니까 안심하세요’라는 둥 아버지 앞에서는 기도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당시엔 저까지 성령으로 기도해버리면 늦둥이에 외동인 저를 망쳤다며 안 그래도 심했던 핍박이 더 심해질 것 같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실지 모르는 일인데, 하나님께 정말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또, 그래서인지 기도 습관이 들지 않았고, 까먹는 날도 종종 있었습니다. 무튼, 할머니께서 편찮으신 뒤로 일어날 힘과 기도할 힘조차 없으셔서 이전보다는 기도를 많이 하실 수 없으셨습니다. 또, 날로 악화되어서 나중엔 거의 못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조급함과 할머니를 위해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누워 계신 할머니 앞에서 성령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할머니와 같은 방, 하나의 침대에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은 왜인지 잠도 잘 들지 않았고 새벽 2시쯤 물을 마시고 다시 침대로 돌아가 할머니께서 숨을 쉬시는지 확인하였습니다. 원래 같으면 한 번 깰수록 더 깊이, 더 오래 잠이 들었을 텐데 그날은 잤다 깨었다를 반복하였고 할머니의 상황을 연신 확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할머니께선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제가 평소처럼 깊이 잠이 들었다면 저는 아침에 해가 밝아서야 할머니의 상황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 하나님께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평안한 마음과 하나님께서 안전히 잘 데려가셨으리라는 믿음이 들었을까 싶습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드립니다.

     

    허나 아버지는 믿음이 없으셨기에 이게 다 교회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교회에 다니는 저의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셨고 슬퍼하셨습니다. 영은회의 시작을 알리는 영은회 엽서는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적도 있고, 그 밖에도 직접적으로 싫음을 표현하셨습니다.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원래도 교회, 특히 방언 소리를 싫어하셨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소리에 민감하고, 잠귀도 밝고, 업무로 인해 지쳐서 피곤한 아버지의 귀에 할머니께서는 매일 저녁 성령으로 기도하시고 주무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음도 이해는 갔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핍박이 심한 날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년도 코로나로 인해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핍박이 이제는 더 이상 핍박이 아니라, 교회에 가지 말라는 통보로 바뀌었습니다. 코로나가 뉴스로 보도된 날 이후로 저는 교회에 가지 못하였고, 몸이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건지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하나님보다 사람을 보러 교회에 갔던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멀어지고 저는 저의 욕심을 채우기에 바빴습니다. 이전에 목자님께서 아버지의 교회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더 유해지기 위해선 교회 생활에도 열심을 다 해야 하지만, 지금 내가 세상에서 맡겨진 일(학생)에 대해서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처음엔 열심히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학업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성적이 점점 좋아질수록 나의 욕심은 커져만 갔고, 이젠 더 이상 아버지를 위함보단 나를 위함이 되어버렸습니다. 공부의 습관도 처음엔 문제집을 풀기 전과 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능력을 구하는 시간을 가졌지만 이후엔 점점 귀찮아하며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10초 정도 되는 시간 동안만 기도하거나 그마저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는 처음엔 교회와 가깝다며 좋아했지만, 나중엔 교회 언니 오빠들을 만날까 조마조마한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언니 오빠들과 선생님이 언제나, 저를 포기하지 않고 시간 내서 만나러 학교 앞까지 와주고 계속해서 심방과 편지를 써주었다는 것입니다. 만나서 안부를 묻고, 가끔은 따끔한 권면도 그 당시에와 지금 모두 감사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가끔씩 써주신 편지들을 꺼내서 읽어보면 당시의 제 자신이 너무 답답하고 감사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와 학교가 가까웠던 것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멀어질수록 죄에 대한 생각도 커져만 갔습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소한 것 하나하나 의미부여를 하며 죄라고 생각했습니다. 공기업 취업을 희망하는 동아리인 공채반에 들어가면서 토요일에도 학교를 나와 강의를 듣고 자습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퇴출이었습니다. 매주 안식일에 교회가 아닌 학교를 선택하는 제 모습을 보며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저의 발걸음은 학교로 향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이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당시 저는 피부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치 여드름의 개수가 내 죄의 개수라고 생각하며 죄책감에 시달렸고 주기도문을 할 때에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와 같이 죄에 관한 내용에서는 더 온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성경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율법주의적인 행동을 보였습니다. 죄책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마음이 아니라 마귀가 주는 마음인 걸 머리로는 알면서도, 그 죄책감으로 인해 하나님과 더 멀어지는 것임을 알면서도 죄책감을 떨쳐낼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모두 지키며 살아간다는 바리새인이라 해도 사랑은 실천할 수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음을 이제는 마음으로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저는 외식하는 자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 부족함을 계속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고 사모한다면,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고 하나님께 메달린다면 하나님께서 기꺼이 이전보다 나은 거룩함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참 감사한 것은, 제가 그렇게 방황하던 와중에도 매일 성경읽기와 기도하기에 힘썼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의 사랑과 권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다시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기도는 기도라 칭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매우 짧고 형식적인 기도였습니다. 가끔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성경 읽기도 묵상은커녕 그냥 읽는 것 조차도 힘들어했고, 자기 전에 누워서 혹은 소위 랩을 하듯 무슨 소리인지도 모른 채 읽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형식적인 기도와 말씀 읽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역사하여 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형식적으로 말씀을 읽는데, 그냥 또 아무생각 없이 읽었음에도 말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열처녀의 비유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미련한 5명의 처녀들을 보며 ‘이건 나다.‘라는 생각과 함께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교회로 가야지, 이제는 돌아가야지, 이제는 그만해야지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 세상을 향한 욕심과 부모님의 기대, 그리고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부담감이 쌓여 계속해서 저를 망설여지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마귀가 심어준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선 저의 그동안의 이런 생각들이 무색할 정도로 말씀 하나만으로 저를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하고 힘 있는지를 몸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형식적이더라도 말씀 읽기와 기도가 습관화 되어야 함을, 그 중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기까지, 하나님께로 다시 나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기도들과 눈물이 있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바쁜 와중에도 매일같이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기도해준 친구, 피곤한 와중에도 멀리 사는 저를 위해, 영은회에 더 오래 참석하게 하기 위해 차량 운행 해주시는 선생님과 성도님 등등..!! 정말 많은 성도님들을 보며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젠, 그 받은 사랑을 나도 전하고 실천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싶습니다.

     

     끝으로, 제가 슬픔보단 평안을 느낄 수 있었던 이유를 아버지도 깨달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아버지께서 자존심이나 세상적인 것들을 선망하는 모습들을 버리고 하나님을 따르는 모습을 상상할 땐, 저에겐 영화같은 이야기, 비현실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요리 솜씨가 있으신 아버지가 주방에서 봉사하는 모습도 상상해봅니다. 이렇게 소망하며, 계속해서 아버지를 위해 기도하다가도 중간에 한 번씩 소홀해지거나 지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이를 위해 ’분명 하나님의 때가 있을 것인데, 그보다 더 빨리 허락하여 주시고 싶을 만큼 간절히 기도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더 간절히, 그리고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해서 구한다면 곧 이루시리라 인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여 주세요.

     

     

    지금까지,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오실 때까지 깨닫고, 사모하며 살기를

    내가 죽고 그가 사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살전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