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tjc-admin

  • 세례(침례)받으면 죄사함을 받고 중생(거듭남)합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아담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이후에 태어나는 후손들이 모두 ‘원죄’(죄를 짓는 그릇된 성향)를 가지고 태어나 일생동안 죄를 짓고 결국 흙으로 돌아가 사망에 이르는 저주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5:12-14) 『[12]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인간이 이 사망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면 생명으로 죄의 값을 치러야 합니다. 범죄함 때문에 사망이 찾아왔으므로 범죄의 대가를 치르고 죄사함을 받을 때 비로소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의 값을 치르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만족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을 대속(대신 값을 치름)하려면 인간의 몸이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소, 양, 염소, 비둘기 등 세상의 어떤 동물이라도, 또 아무리 많은 수 동물이라도 한 인간의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인간의 생명만이 그 가치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흠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흠없이 창조하신 것처럼 아무 흠이 없는 존재가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새 차를 파손했으면 피해자에게 새 차로 교환해 주어야지 중고차로 대신 보상하겠다고 말한다면 피해자는 이 제안을 당연히 거절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인간의 대속을 위해서 두 조건을 만족해야 합니다. 이 조건을 만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여느 인간과는 달리 동정녀에게서 태어나서 원죄도 없고 아무런 흠결이 없는 인간입니다.

    (벧전 1:18-19)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요 8: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인간이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 흠없는 생명을 대신 제물로 드려야 하는 상황은 마치 어떤 노인이 돈이 없어서 빵을 훔쳤는데 재판관이 벌금형을 선고받고 죄값을 치러야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벌금을 낼 수 있습니까? 그 돈이 있었다면 이미 빵을 훔치지 않고 사먹었겠지요. 그렇다면 절도죄로 체포되어 재판받을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진퇴양난의 상황, 딜레마에 빠진 것이 바로 인간의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 빠진 인간들을 위해 대신 죄값을 치르신 분이 바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출 21:24-25) 『[24]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 데운 것은 데움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흠없는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남자를 알지 못하는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흠없는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제물로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입으려면 대속(대신 값을 치르고 구함)하신 분과 관계를 맺어야합니다. 그 관계란 십자가의 죽음의 효력이 개인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개인에게 미치려면 먼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받으신 것과 같은 세례(침례. 물에 잠기는 성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 세례를 통해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다시 살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하면서 올바른 세례를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모순이요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믿음으로 순종하고 세례를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이 ‘의롭다’고 선언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세례 받는 행위가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이는 표현이며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로운 분으로 인정하는 자(세례 받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선언을 가리켜 ‘칭의’(의롭다고 선언해 줌)라고 합니다. 이는 마치 옷이 더럽혀진 사람이 새로운 ‘흰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야곱이 형 ‘에서’의 옷을 입고 대신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받은 것처럼 세례를 받으면 자기 죄의 수치를 가릴 수 있고 하나님께 복받을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침례)는 물에 완전히 잠겼다가 올라와야 하는데 이것은 정확히 세례의 정의와 일치합니다. 우리가 물에 잠기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같이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우리가 물에서 올라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심과 같이 우리도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처럼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죽을 수 없지만 예수님이 대신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세례를 통해 그분과 연합하면 죽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성례입니다.

    (갈 3: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롬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 전하는 진리가 성경과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진리를 자신의 몸인 교회 안에 담아 두셨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교회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이는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류 구원 계획이 교회를 통해서 구현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했습니다.

    (딤전 3: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오늘날 그 진리는 복음 안에 담겨 있으며 교회가 표방하는 복음은 ‘교리'(dogma)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가 다르다는 것은 복음이 다르다는 것이고 다른 복음이란 곧 진리를 변질시킨 거짓된 복음입니다. 심각한 점은 진리가 없으면 사람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초대교회 시대에 이미 다른 복음이 존재했고 그릇된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왔고 이에 대해 바울은 저주받을 일이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경계하고 있습니다.

    (갈 1: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갈 1: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 사도가 경계하고 우려했던대로 초대교회는 다른 복음에 미혹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정치 세력과 결탁한 후 진리의 기둥을 이루었던 교리의 항목들은 하나 둘씩 변질되고 제거되었으며 그 결과 구원의 능력을 상실한 교회 아닌 교회로 전락했습니다. 또 천주교의 불법과 범죄에 분개하여 일어난 개혁교회도 오늘날 처음 개혁의 기치를 내걸었던 동기와는 모순되게 타락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폐해졌다고 주장하면서 어떤 경우 구약의 율법 준수를 강요하듯 행위를 강요합니다. 또 천주교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했던 그들이 오히려 헌금 강요로 교회의 부를 축적하는 모순된 모습을 보입니다. 힘있는 정치인과 관계를 맺기를 좋아하고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습은 천주교의 그것과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도들이 말씀에 순종하고 그 결과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기복신앙에 빠지게 만들고 장로, 권사, 집사 같은 직분 제도를 통해서 사사로운 명예심을 자랑하도록 부추깁니다. 이런 모든 문제의 출발은 사실 그들이 전하는 복음이 성경에서 멀어진 잘못된 교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교리가 잘못되면 윤리도 잘못됩니다.

    (행 20:29-30)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교회 분파의 요인은 몇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이 교리에 의한 분파입니다. 교회는 표방하는 교리에 따라 여러 교단과 교파로 분열되어 왔습니다. 그 실상은 이렇습니다. 세례를 받되 침례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침례교단, 일요일이 아닌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안식교단, 오순절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한 교파가 오순절교단입니다. 모두 나름대로 성경에서 옳은 것을 추구하여 주장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리는 완전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만 온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완전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이 세우신 모든 요소들을 다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라도 누락되면 그것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지시하신 잣나무로 만들지 않았다면, 역청으로 안팎을 칠하지 않았다면, 가로 세로 높이를 하나님이 지시하신 치수대로 만들지 않았다면 아마도 거센 물살에 끝내 파선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의 방주 사건은 교리적인 차원에서 하나의 비유입니다. 구원의 방주로 비유되는 교회가 완전한 구원의 교리를 구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창 6:22)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창 7:5)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모든 것이 구비된 온전한 교리를 세우지 않으면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하나님의 구원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온전한 교리는 모두 예수께서 세우신 것이며 인간이 개입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것, 그분이 동정녀에게서 나신 것,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 부활하신 것, 승천하신 것, 약속의 성령을 내려주신 것, 거듭남의 물세례를 명령하신 것 등 모두 하나님 자신이 이루신 것입니다. 이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불완전하다면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구원을 위해서 그 완전한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온전한 교리에 순종할 때 우리는 온전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따라서 위에서 살펴본대로 구원을 보장하는 참교회란 바로 인간 구원의 능력을 담은 온전한 교리를 소유한 교회여야 합니다. 성경적 죄사함의 ‘물세례’를 시행하고, 오순절과 같은 ‘약속의 성령’이 임재해야 하고, 성경적 기적 이사가 나타나야 하고, 창조 때부터 설립된 ‘은혜의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본회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되 하나님이 명령하신 방주의 제도를 그대로 준행한 것처럼, 출애굽 광야시대에 모세가 하나님이 명하신 설계도대로 성막을 건축한 것처럼 온전한 구원의 교리를 순종하여 세워진 교회입니다. 오늘날 사람의 생각대로 세워진 교리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소유했던 바로 그 교리, 그래서 인간을 구원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교리를 실천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 교회에 성경적인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경험할 수 없는 초월적인 세계에 계십니다. 사람은 그 세계에 도달할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때로는 천지만물에 부여하신 원리와 법칙을 넘어서는 특별한 현상을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연법칙을 거스려 나타나는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을 일컬어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칭합니다. 하나님은 때로 성령이 내려주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분이며 큰 능력이 있는 분임을 증거하십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라고 성도에게 그런 기적이 따를 것을 언급하셨습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막 16:17-18)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에 병든 자가 치유되는 기적을 가장 많이 보여주셨듯이 오늘날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 가운데 가장 많은 기적은 바로 병든 사람이 치유받는 은혜의 기적입니다. 개인 기도를 통해서, 안수를 통해서, 교회의 합심 기도를 통해서 병세가 호전되고 병자가 완치되는 예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신앙인들은 이런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면 ‘열광주의자’니 ‘신비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기적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것은 성경적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기적도 있지만 어떤 경우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도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가령 어떤 자가 병을 고칠 때 무당의 주술하는 방법을 동원하여 고치거나, 병자의 환부를 상해하는 방법으로 고치거나, 안찰이라고 명목으로 환자를 눕히고 신체의 일부를 구타하는 방법을 쓰거나하는 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해괴한 방법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런 방법과 과정으로 병자를 치료한 적이 없습니다. 또 치료를 명목으로 금전을 요구하거나, 병고친 후 특정한 사람을 숭배하게 하거나, 완치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후 그와 달리 오히려 악화되었거나 하면 그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성경적인 기적이 아닙니다. 모두 마귀로부터 오는 거짓 기적이므로 이를 수행하는 사람을 거절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막 13:2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출 7:11-12) 『[11] 바로도 박사와 박수를 부르매 그 애굽 술객들도 그 술법으로 그와 같이 행하되 [12] 각 사람이 지팡이를 던지매 뱀이 되었으나 아론의 지팡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키니라』

     

    (계 13:13)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오게 하고』

     

    (레 19:31)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성령으로부터 오는 참다운 기적은 성경의 기록과 그 현상이 일치해야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적은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성도나 교회 공인된 지도자를 통해서 조용히 안수를 받거나, 본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금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치유의 은혜는 성령께서 비둘기같이 온유하게 임하시듯이 조용한 가운데 주어집니다. 또 그런 은사를 발휘한 자가 특정한 사람을 우상화하고 추종하도록 강요하거나 무속신앙인들이 복채를 요구하듯이 헌금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주님의 교훈대로 오로지 하나님께 자원하는 마음으로 즐겁게 감사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기적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적은 일어납니다. 본회에서는 종종 성령으로부터 오는 성경적인 기적을 체험하고 간증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실은 본회가 성령이 임재하시는 참교회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 교회에 성령이 계십니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 직후 탄생했습니다. 성령 강림을 체험한 사도들은 비로소 그 이후에야 복음 전파 사역을 시작했고 그 복음 전파 사역의 핵심은 바로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물세례’와 천국 기업을 보증하는 ‘성령세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세우신 목적은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마땅히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두 가지 핵심 ‘물세례’와 ‘성령세례’의 진리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죄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성령이 임재하시는 교회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요 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셔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고 뒤이어 죄사함의 권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내주’가 ‘죄사함의 권세’와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성령의 내주가 없으면 사죄의 권세도 없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참 교회라면 초대 교회처럼 먼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임재하셔야 합니다. 만약 오순절과 동일한 약속의 성령이 없으면 그 단체는 사죄의 권세가 나타날 수 없는 껍데기 단체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발달한 한국에는 대단히 많은 단체가 교회 간판을 걸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형 건물, 다수의 신도, 치밀한 교회 조직, 끈끈한 인간관계, 유익한 문화 프로그램, 유명한 신학자와 기관들, 신도들의 강한 연대의식으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교회에 성령이 계시지 않고 또 죄사함의 권세가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조직이나 단체에 불과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려면 예수께서 교회 안에 두셨던 초대교회의 성경적 교리를 구비해야 하는데 그 교리가 없다면 사람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면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므로 이미 교회라고 칭할 수 없습니다.

     

  • 본 교회는 예수님께서 늦은 비 성령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신약 교회의 출발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라는 유대인의 절기 때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오순절 절기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강림하셨고 약속의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권능을 받고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오늘날 한국에는 많은 교단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래 초대교회는 이렇게 분열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분열된 배경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그 원인과 과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기독교 신앙 공동체에 유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약 삼백년이 지날 무렵 순수한 초대교회의 신앙은 이교도의 우상숭배의 문화와 결합하면서 점점 변질되어갔습니다.

    동양의 신비종교의 사상이 담긴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과 헬라의 철학 사상이 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더욱이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A.D. 313년) 이후 교회는 잔혹한 핍박은 면하게 되었지만 로마의 정치 세력과 타협하면서 순수한 신앙의 공동체로서의 교회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세속 권력과 결탁한 종교 집단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 타락의 결과 교회는 교리적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시고자 교회에 세워두셨던 온전한 교리들이 변질되고 제거되는 통탄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일신론은 이교에서 유래한 삼신론에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론으로 대치되었고, 세례는 본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성례로 온 몸이 물에 잠기는 침례였지만 그 중생의 실효성을 부정하며 상징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 실내에서 이마에 물을 찍어 주는 약식 세례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마치신 직후 세우신 제칠일 안식일(토요일)을 당시 로마 태양신 숭배일인 일요일로 대치시켰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 인간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세우신 구원의 교리들은 교회 안에서 사라졌고 교회로서의 영적인 권세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솔로몬 성전을 훼파하고 그 안에 기물들을 다 약탈해 간 것처럼 초대 교회 안에 존재했던 영적 기물들(구원의 교리들)은 모두 이단 사상에 의해 약탈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타락하여 더 이상 교회라고 일컬을 수 없을만큼 부패하게 되자 성령 강림이 중단되게 됩니다. 로마 정부의 정치 세력과 타협한 교회는 더 이상 순수한 교회가 아니라 세속의 권력과 결탁한 타락한 집단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 때부터 로마 천주교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딤전 4: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행 20: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로마의 세속 권력과 결탁한 천주교는 역사 속에서 많은 불의를 자행했습니다. 교황은 베드로의 사도권을 직접 계승한 존재로 여겨졌으며 그 세속적 권세가 매우 강했습니다. 과거 역사를 살펴볼 때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로마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그 당시 교황의 권세가 얼마나 위세를 떨쳤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 교황의 절대 권력 아래 천주교는 종교재판을 통해 선량한 신앙인들을 탄압하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 역사 속의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성 베드로 성당을 건축할 재원 마련을 위해 거짓된 교리까지 만듭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위해 ‘면죄부’를 구매하면 그 영혼이 연옥에서 천국으로 격상된다는 허황된 연옥교리였습니다. 독일의 한 천주교 사제였던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이러한 천주교의 거짓 교리와 불의한 행태에 분개해서 1517년 10월 경 천주교의 여러 가지 모순을 지적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문에 내걸었고 이에 군중이 호응하고 연합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비로소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의 처음 동기와 출발은 순수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종교 개혁’의 본질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이는 ‘종교 분열’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종교 개혁이 시작된 때를 기점으로 지금까지 개신교는 교리상의 이견, 교회 정치상의 이견 등으로 수백 수천개의 교단 교파로 분열을 거듭해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렇게 많은 교단 교파가 난립하게 된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바로 종교 개혁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일례로 종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 가운데 루터와 동료였던 쯔빙글리(Vlrich Zwingli)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는 ‘성찬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인해 루터와 결별합니다. 이미 개신교는 출발부터가 이러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즉 개혁교회는 ‘종교 개혁’이라고 기치를 내걸었지만 그 성격을 살펴볼 때 초대교회의 순수성을 온전히 회복한 개혁이 아니었습니다. 본래 루터는 종교 개혁의 의도가 없었습니다. 타락한 천주교의 부조리만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출발이 이러하니 개신교는 천주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 증거는 천주교에서 황제에 의해 변경된 성일, 즉 일요일 준수를 그대로 계승했고 천주교의 영세와 유사한 형태의 세례를 시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가 상징에 불과하고 단지 교회 입교 절차로 필요한 과정으로만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 개신교의 종교 개혁 운동의 성격을 짚어보면 사실은 인류사에서 인문주의, 계몽운동이 싹트던 시대의 흐름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은 인간이 과거보다 현명해지다보니 자연스럽게 촉발된 인간으로부터의 움직임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인간에 의한 개혁인지라 불완전한 개혁에 머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이 세우셨던 진리의 기둥들, 영적 성전에 있어야할 진리의 기둥들(세례, 성령, 안식일 등)은 회복하지 못하고 사람의 생각대로 사람들이 만들어낸 교리들로 교회의 내소를 치장한 것입니다.

    (마 15: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불완전한 인간으로부터 시작된 아래로부터의 개혁은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불완전한 교리로는 사람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완전하신 하나님이 위로부터 완전한 개혁을 다시 시작하셨습니다. 종교 개혁 이후 세월이 흘러 19세기에 이르러서 그 전조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사도시대 오순절과 같은 성령이 내리는 일이 발생합니다. 당시 미국의 세속화된 교회를 한탄하며 순수한 신앙을 추구하던 일부의 사람들이 성령을 체험하게 되고 그 세력은 점점 확대되었습니다. 이윽고 자신들의 새로운 복음에 사명을 느낀 자들은 오순절과 같은 체험의 성령을 세계 곳곳에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 물결이 중국에도 전달되었습니다. 이런 위로부터 시작된 신앙 개혁의 과정 속에서 초대 교회와 동일한 구원의 교리를 갖춘 교회가 나타납니다. 중국 산동성에서 사도 시대의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성령이 강림하시고 초대교회를 계승한 참교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타락했던 교회가 하늘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개혁에 의해서 말세에 다시 회복된 것입니다.

    (욜 2:23) 『시온의 자녀들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그가 너희를 위하여 비를 내리시되 이른비와 늦은비가 전과 같을 것이라』

     

    (겔 34:26)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비를 내리리라』

     

    이스라엘에서는 농사에 있어서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데 그것은 이른비(가을비)와 봄비(늦은비)입니다. 밀이나 보리 파종 전에 반드시 이른비(가을비)가 내려야 파종할 수 있고 추수 전에는 반드시 늦은비(봄비)가 내려야 추수할 수 있습니다. 겨울은 우기로서 장마비가 오고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땅에서 농사에 중요한 비가 두 차례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 농사, 즉 인류 구원의 밭인 지구상에 ‘영적인 비’가 두 차례 내릴 일에 대해서 성경은 상징적으로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팔레스틴의 기후와 관련한 농사문화를 통해 인류사에서 두 차례 나뉘어 내릴 성령 강림의 사건을 비유하셨습니다. 즉 이른비란 사도교회의 오순절 성령을 상징하고, 늦은비는 말세에 다시 회복된 참교회에 내릴 성령 강림을 상징합니다. 이 말세에 내리신 늦은비 성령 강림으로 설립된 교회가 바로 참예수교회입니다.

    16세기 마틴 루터에 의해 아래로부터의 불완전한 종교 개혁과는 달리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서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위로부터의 온전한 개혁을 진행하셨습니다. 그 개혁의 결과 죄사함의 은혜를 주는 성경적 세례(거듭남의 물세례), 천국 기업의 보증이 되는 약속의 성령(거듭남의 성령세례), 천주교에서 변경한 일요일을 다시 토요일로 회복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완전한 것이고 만족스러운 것이었다면 하나님은 20세기에 이르러 굳이 성령을 이 땅에 다시 내려주시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루터에 의해 시작된 개혁 교회도 천주교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류가 많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참교회를 회복시키시고 인류의 구원 사역을 지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개혁하시고 회복시키신 본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 세족례에는 사랑,성결, 겸손, 봉사, 용서의 교훈이 있습니다.

    세족례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는 교훈이 들어있습니다. 오늘날 나는 그 교훈을 발견하고 세족례를 받을 때마다 마음 속으로 그 뜻을 깊이 새기고 이웃들에게 주님을 닮은 모습을 나타내고 있습니까? 그러면 구체적으로 세족례를 통해 실천해야 하는 주님을 닮은 신앙의 모습이란 어떤 것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른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족례를 행하실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 십자가에서 피흘리시는 섬김의 왕이 되시고자 하셨지만 제자들은 주님이 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유대 민족을 독립시켜줄 정치적인 임금으로 즉위할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관심은 어떻게 주님의 십자가를 따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주님 곁에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에 모아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시고 매우 가슴이 아프셨을 것입니다. 그동안 주님을 따라다니며 배웠지만 예수님의 정신과 모범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또 주님이 세 번이나 십자가 수난에 대해서 예언했건만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배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주의 나라가 임할 때 주의 좌편과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이들의 요청에 대해 분노를 발했습니다. 분노를 느낀다는 것은 그들도 똑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서로 반목하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는 어리석고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둘째, 생활 속에서 자신의 성결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은 땅에 발을 디디고 생활하므로 신체 가운데 가장 쉽게 오염될 수 있는 부분이 바로 발입니다. 그래서 매일 씻고 관리하지 않으면 위생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질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해서 성도가 완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삶 속에서 세속의 여러 가지 부정하고 불결한 것들에 유혹받을 수 있고 부정한 생각을 하고 불결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근원적으로 범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자신을 영적으로 깨끗하게 관리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매일 자신의 발을 닦고 관리하듯이 성도는 매일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혹시 자신의 잘못된 행실을 깨닫거나 범죄한 사실이 있다면 주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게 지속적으로 성결을 추구하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의 영혼은 점점 하나님을 닮은 아름다운 형상의 성도로 점점 변화하게 됩니다. 이처럼 세족례는 이미 물세례는 받았으나 불완전한 성도가 어떻게 성결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약 4: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셋째, 겸손하게 낮아져서 봉사의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유대 사회에서 외출했던 어떤 사람이 귀가하면 그 발을 닦아주는 일은 그 가정의 종 가운데 가장 비천한 종이 담당하는 몫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만찬을 가지실 무렵 ‘누가 높으냐’하는 문제로 서로 반목하는 분위기 속에 있던 제자들은 결코 동료들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먼저 대야에 물을 가져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발을 씻기려고 하실 때 제자들은 얼마나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런 행위가 반목하는 분위기의 제자들에게 어떤 충격을 주었을지 가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신분이 높은 자가 낮은 자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국에서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먼저 자신을 낮추고 남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훈의 가르침대로 그분 자신이 세족례를 통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세족례 안에는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내가 남보다 낮아져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빌 2: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막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벧전 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넷째,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신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가룟 유다가 있습니다. 이 제자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패륜의 인물입니다. 예수님은 그가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마음을 품은 유다를 돌이키시려고 간접적으로 수차례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바로 스승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품었던 가룟 유다를 겨냥한 말씀입니다. 또 만찬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도 역시 가룟 유다를 겨냥한 지적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게 내 마음을 아고 계셨지? 아! 내가 죄를 지었구나! 스승님께 용서를 구하자’라고 깨닫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또 예수님은 최후로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가룟 유다에게 직접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가룟 유다를 겨냥하여 수차례 돌이키도록 수차례 말씀하시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그런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됩니다. 평소 예수님은 원수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하라는 교훈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가르침대로 유다의 발을 씻기시는 행동을 통해서 원수의 죄를 용서하시는 모습을 나타내셨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세족례를 통해서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용서와 관용의 정신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성도와의 관계 속에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모두 불완전하기 때문에 때로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분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면서 해소될 수 있으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 세족례를 통해 주님의 정신을 되새기며 서로 화해와 용서를 도모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골 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살전 5: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 성경은 신도생활의 기준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그 나라 국민이라면 반드시 준수해야하는 국법이 있는 것처럼 천국의 시민인 성도도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천국의 법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법 가운데 가장 상위의 법이 헌법이듯이 천국의 법에서 가장 근본적인 핵심의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주신 구원의 과정 즉,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령을 내려주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모든 과정에 대해서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란 주님이 우리에게 그와 같은 모든 구원의 과정을 마련해 주셨으니 그 사랑과 은혜를 입은 하늘나라 백성으로서 마땅히 나타낼 성결하고 의로운 삶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성결하고 의로운 삶도 우리 자신의 능력과 의지로 이루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씀을 순종하는 실천의 의지가 발휘될 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나타낸 의로운 삶을 ‘성령의 열매’라고 부릅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선 검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속에 추악한 죄악을 제거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지도록 인도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신체를 그대로 비춰주는 거울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아 고칠 수 있게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의한 변화의 과정이 없다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없으면 이웃 사랑의 계명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마치 미성숙한 어린 아이는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배려하고 돌보아주지 못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처럼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어린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할 수 있습니다(참고. 고전 1:10-13 3:1-4). 따라서 성도는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뜻을 깨닫고 성령으로 기도하여 영혼의 성장과 성숙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이 지속될 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점점 변화하게 되고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딤후 3: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성경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이 복의 근원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말씀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고 실천할 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52시간 20분, 신약성경은 7시간 40분으로 육십 육권을 모두 읽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0시간 정도라고 합니다. 성경 전권을 단기간에 통독하는 일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적은 분량이라도 매일 일정한 분량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말씀을 암송하여 마음판에 새기려고 노력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암송하면 더 깊은 감동과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잠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 성경은 진리를 증명하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모두 사람들에게 특정한 유익을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사람이 죽은 이후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목적으로 기록된 책은 성경 뿐입니다. 모든 책들 가운데 독특하고도 유일한 목적입니다.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은 성경의 주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목적대로 그 주제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고 어떤 과정을 통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 그 계획과 성취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은 모두 장래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행하실 일들의 예표(예언 등을 미리 보여주는 조짐)입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애굽 바로 왕의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홍해를 건넌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악 세상의 노예가 된 인간들을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일을 예표합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 정복 전쟁을 수행한 여호수아는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이끌고 천국을 침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들과 그분이 장차 하실 일에 대해서 예표하는 사건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지어 구약의 모든 내용이 곧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습니다.

    (요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개신교에서는 천주교와는 달리 오로지 구약 삽십 구권과 신약 이십칠 권만 정경으로 인정하며 그 외의 외경(성경외의 경전)이나 위경(올바른 신앙에서 벗어난 거짓 경전)과 같은 것들은 정경(바른 경전)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외경과 위경에는 본래의 신앙 정신에서 변질되거나 동방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은 이단적인 내용들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바른 기독교 신앙을 추구한다면 66권의 경권만 정경(正經)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것은 성경에 포함되고 어떤 것은 제외하는 문제는 이미 기독교 역사 속에서 순수한 신앙의 정기를 소유했던 초대교회에서 판단하고 구별하여 정리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동일한 신앙의 길을 가는 우리는 육십 육권의 성경만 정경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고후 2:17) 『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고후 4:2)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 성경은 모두 하나님의 감동로 된 것입니다.

    성경은 약 1,500년의 기간 동안 약 40여명의 인간 저자를 통해 기록되었습니다. 그 저자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직업, 살았던 시대, 개성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그 가운데에는 왕족, 제사장도 있었지만 농부, 목동이 직업인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한 사람의 저자가 그 내용을 구성하고 기록한 것처럼 일관된 주제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그 일관된 주제란 바로 인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성경의 저자가 눈에 보이는 인간 저자들(이를 제 2저자라고 부름)이 아니라 사실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를 제 1저자라고 부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개성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출신, 학문의 정도, 개성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따라서 성경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해 감동(영감)된 사람들이 기록한 문서’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이 인간 저자를 ‘감동’, 또는 ‘영감’시킨 상태에서 그를 도구로 삼아 기록한 것이 성경입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도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의‘감동’ 또는 ‘영감’(inspiration)이란 의미는 ‘신의 바람을 쏘인’(데오스 퓨뉴스토스)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영靈, 바람)에 쏘여져 하나님의 도구가 된 자들의 저작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딤후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벧후1:20-21)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그와 관련된 일들을 자주 인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구약 성경을 인용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의 진실성을 입증합니다(참고. 요5:46). 또 보편적인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토라’(Torah:율법서) ‘느비임’(Neviim:선지서) ‘크투빔’(Kethoubim:성문서)으로 삼분하는데 예수님도 그와 같이 구약 성경을 셋으로 분류하셨습니다. 위와 같은 사실들로 미루어 보아 예수님은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로 된 글임을 받아들이셨고 그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한 분이라고 믿는다면 그분이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셨듯이 우리도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어야 마땅합니다.

    (눅 24: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 시대의 ‘성경’은 구약 성경에 한정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시대에는 아직 신약 성경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약 성경을 기록하신 적이 없고 또 제자들에게 기록하라고 명령하신 적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신약이라는 것이 경전으로 존재합니다. 구약 성경은 앞서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인정하시니까 우리도 구약 성경을 믿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약 성경은 무엇을 근거로 기독교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이 신약 성경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신앙생활의 소산물로 출현했습니다. 신약 성경은 본래 초대 교회 성도들이 교회를 이루고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예수님의 직계 제자나 그에 준하는 자들이 기록한 문서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직계제자나 그에 준하는 인물들의 저작을 교회 공동체 내에서 일찍이 신령한 문서로 취급했습니다. 그 증거를 신약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 베드로는 바울의 편지를 언급합니다. 이 바울의 편지가 바로 오늘날 바울 서신이라고 일컫는 신약의 경권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이 바울의 편지를 마치 구약 성경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처럼 바울의 편지(바울 서신)도 억지로 해석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 교회가 구약 성경을 다루듯이 바울의 편지를 다루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구약 성경을 권위있는 문서로 보듯이 바울의 편지도 권위있는 문서로 본 것입니다. 이는 조금 확대해서 해석하면 사도들의 편지를 구약 성경처럼 새로운 경전으로 삼게되는 근거가 됩니다. 이렇게 권위있는 문서로 인정받은 문서들이 수집되어 오늘날 우리에게 27권의 신약 경전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성도들을 신뢰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신약 성경을 새로운 언약의 경전으로 믿을 수 있습니다.

    (벧후 3:15-16)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구약 성경)과 같이 그것도(바울의 편지)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던 사도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그분의 생생한 교훈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이에 교회는 평소 교훈의 내용을 상기시켜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을 유지하고 가르치는 경전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교회 공동체의 동의에 의해 편집이 완료되어 회의를 통해 경전으로 선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않아야할 점은 인간이 만든 회의체에서 성경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초대교회가 과거부터 순수한 신앙의 교본들로 삼았왔던 편지들을 회의의 과정을 통해 경전으로 재확인하고 천명한 것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 성경을 신앙의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고 그 안에 담긴 교훈을 믿을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이십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인류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려면 첫째,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고 둘째, 전 인류를 구원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사랑이 있더라고 능력이 없으면 아무 것도 줄 수 없습니다. 또 아무리 능력이 있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심으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고 부활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능력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인류사에서 어떤 종교의 교주나 훌륭한 성현도 죽음을 경험했거나 죽음에서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습니다. 더욱이 그 죽음이 인류를 위한 것이고 부활이 또한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의 능력을 증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유일한 구세주가 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고전 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세상은 기독교를 일컬어 독선적이라고 비판합니다. 다른 길은 없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유일성에 대한 주장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선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젠가 제자들에게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살펴보면 이 보다 독선적인 선언은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은 다른 길은 모두 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의 배타성은 바로 이 선언에서 출발합니다. 이와 같은 유일성은 제자들도 분명히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초대교회를 막 시작한 사도와 성도들은 유대인의 산헤드린 공회(이스라엘의 종교재판소) 앞에서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도 같은 믿음을 가지고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불신자들은 큰 의문이 있습니다. ‘내가 만나보지도 않은 수천 년 전의 인물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하고 사망의 저주에 놓여야 하는가?’하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이 의문은 예수님을 믿으면 모두 풀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문제를 예수 한 분으로 인해 다시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인류의 첫 번째 아담이 일으킨 문제를 인류의 두 번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책임지고 해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도 아니고 아담의 불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무책임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로 당신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시려는 깊은 사랑과 관용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성경의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