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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므리바 반석의 물(민20:10~13)

    [설교 제목] 므리바 반석의 물(민20:10~13)

    [설교자] 허덕인 목자님

    [설교일] 2022년 12월 17일(토) 안식일 예배

      우리는 과연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 안에 변화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같은 실수나 과오를 범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 후 시간이 흘러 또 다시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한번 이 문제를 생각해보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출17:3)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당시 신 광야에서 떠나 르비딤에 장막을 치고 백성들이 마실 물이 없자 모세에게 원망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출17:7) 모세는 곧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반석을 쳐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민수기 20장에 와서 또 어디선가 본듯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온 회중이 신 광야에 이르러 가데스에 거하였는데 회중이 물이 없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였습니다. 왜 아직도 여전히 이 백성들은 예전의 잘못을 기억해내지 못하고 또 다시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비슷한 시련 앞에서 어떤 모습입니까? 어떻게 하면 저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원망의 말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고통과 시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와 아론은 회막문에 이르러 엎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고 물을 얻을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백성들이 있는 곳에서 마치 자신이 물을 내어 주는 냥 하나님 앞에서 분(忿)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방법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으나 모세는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을 얻었습니다. 출애굽 신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고 모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민수기 시대 신 광야에서 모세는 입술로 망령되이 행함으로써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과를 맞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또 므리바 물에서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으므로 저희로 인하여 얼이 모세에게 미쳤나니 이는 저희가 그 심령을 거역함을 인하여 모세가 그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시106:32~33)

      둘째, 깨어있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출애굽 때 신 광야 물 사건이 난 그곳 이름은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습니다. 민수기 때의 이 물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손이 이를 두고 ‘므리바 물’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전자는 장소로써 가리킨 말이고 후자는 여호와께서 반석에서 내신 물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다투다, 싸우다, 다툼, 투쟁’의 의미로 보았을 때 물 때문에 백성들과 모세가 다투었다는 의미로 ‘므리바’는 상호 관련이 있는 명칭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두 번의 므리바 물 사건을 통해 좀 더 깨어 있는 신앙 생활을 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했고, 공의를 행해야 했습니다. 믿음 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치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양 말씀으로 다른 형제 자매를 향해 공의롭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부지런히 자신의 신앙 생활을 살펴야 합니다.

      오늘 이 두 번의 므리바 물 사건을 통해 변화되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자신의 믿음 생활을 보면서 더욱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합시다.

  • [복음메시지] 쉬게 하리라 (마11:28-30)

    [복음메시지] 쉬게 하리라 (마11:28-30)

    [말씀 제목] 쉬게 하리라 (마11:28-30)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2. 10.8(토) 안식일 예배

    인생을 살면서 감당해야 할 짐으로 사람들은 힘들어 합니다.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내야 하는 삶의 짐, 그 보다 더 무거울 수 있는 죄의 짐, 그리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신앙의 짐이 그것입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감당할 수 없나이다 (시38:4)”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듣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마음에 평안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가 주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수고도, 아무 짐도 안 지게 하시겠다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도서는 수고로 낙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전5:18)”

    수고 자체가 안 좋은 것이 아니라 수고를 했는데도 아무런 즐거움, 보람, 열매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과적으로 헛된 삶을 살았을 때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삶 뿐 아니라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수고가 헛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라는 시편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셔야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에 베드로가 밤이 맞도록 그물을 내려 수고했으나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많은 고기를 잡게 됩니다. 몸은 물론 힘들었지만 마음은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진정한 쉼은 바로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열매와 즐거움이 있을 때 얻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수고만 있고 기쁨과 보람이 없으면 무거운 짐처럼 느껴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을까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먼저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신 일, 곧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멍에를 메야합니다. 전도서는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전12:13)”라고 말씀하십니다. 본분을 다하면 마음이 뿌듯하고 보람되고 평안합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고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쉼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되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순종의 삶을 마치고 난 후 비로소 누리는 참된 안식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더라(계14:13)”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멍에를 두 마리 소가 같이 메듯이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예수님과 동행하면 어렵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체험하기도 하고 힘과 능을 주심으로 어려움을 감당케 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감당할 수 없는 환난에는 우리를 안으셔서 구원해 내십니다.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사63:9)”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메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수님과 한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기존의 자신의 생각을 버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는 회개의 삶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두 번째로 진정한 쉼을 위해서는 예수님께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온전하게 하나님의 아들로서 순종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그 분의 도우심을 받았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예수님이 그렇게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 이유는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14:31)”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라반에게 칠년간 봉사할 때 칠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한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계명을 따를 때 우리의 짐은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많을수록 자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행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부분에 본이 되셨고 바울사도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와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된 바울 사도처럼 주님을 본받는 자 되길 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유튜브 예배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메시지]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11)

    [복음메시지]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살전 5:9~11)

    일시 : 7월 16일 토요일 오전예배

    제목 :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본문 : 살전 5:9~11

     

    (살전 5:9~11)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어떤 일반교회 신도가 항상 하나님께 매를 맞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말로만 매를 맞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하나님을 항상 징계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늘 매를 들고 계시는 분은 아닙니다. 그분은 하나님은 잘못 알고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보다 하나님 자신 스스로 소개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가 있습니다. 매를 드시는 하나님은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고, 직접 하나님이 자신을 소개한 성경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앙을 줄려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장래에 소망을 줄려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세상 끝날 종말에 관한 내용은 우리를 긴장하게 만듭니다. 종말은 크고 두려운 날이고 심판의 날이고 심판은 또 두 종류로 나누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을 막연히 두려운 대상으로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믿어야 합니다.

    (살전 5:9)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노하심의 하나님이 아니요, 구원을 얻게 하실려고 우리를 세우셨습니다. 이렇게 거룩한 안식일에 성도들을 불러 모으신 것도 오직 구원을 얻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딤후 4: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사도는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무슨 근거로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자신 있게 고백을 했을까요?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사도는 자신 스스로를 예수를 대적한 사람이요 믿는 사람을 훼방하고 핍박한 폭력자요 결국 스데반집사까지 죽게 한 죄인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한테 정작 징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런 나 같은 죄인도 하나님이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잔멸할 정도로 큰 죄를 지은 죄인중의 괴수인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을 보이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셨으니 하나님은 징계의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기의 경험을 통해 자신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은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까요? 바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예수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입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내가 구원을 얻은 이유는 내가 착해서도 아니요 내 노력도 아니요 내 공로도 아닙니다.

    (롬5: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롬5:8)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십자가의 구속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구원안에는 반드시 십자가위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원래는 내가 죽어야 할 죄인인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2000년전 가장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는 나를 향한 구원이 들어 있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향한 구속의 고마움을 알 때 믿음이 생기고 나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목숨까지 버리면서까지 십자가에 죽으셨을까요? 그 목적이 분명히 있습니다.

    (살전 5:10)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바로 사랑하는 우리와 함께 살든지 죽든지 영원히 함께 살고 싶어 하는 예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마지막으로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살전 5:11)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피차 권면하는 삶을 살으라는 것입니다. 권면은 옆에서 위로하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확신하는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사40:1)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그럼 어떻게 하면 위로하고 권면을 할까요? 바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은 믿음의 집이 튼튼히 서갈 수 있도록 서로 돕고 협력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럴 때 종말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종말이 가까울수록 예수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살전4:9~10)형제 사라아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너희가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데살로니가교회는 믿는 자의 본이 되는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잘했지만 앞으로 더 힘쓰고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런 교회가 서로의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살전 4: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회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를 생각하면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는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이 행복과 기쁨이 성도님들의 행복이 되고 기쁨이 되길 소망합니다. 또한 구원의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아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님이 되시길 예수그리스도이름으로 소망합니다.

     

  • [복음메시지] 축복을이어가는 믿음 (히11:20)

    [복음메시지] 축복을이어가는 믿음 (히11:20)

    [말씀 제목] 축복을 이어가는 믿음 (히 11:20)

    [설교자] 김용준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이삭의 일생은 평범한 삶이었다. 특징적인 믿음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삭에 대해서는 이 짧은 구절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삭은 믿음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삭의 일생 가운데 주목하는 것은 무엇인가? 축복을 후손들에게 이어주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우리가 이삭을 통해서 배워야 할 믿음이 이것이다. 후손을 믿음으로 축복했던 믿음이다. 이삭의 특별한 믿음 세 가지는 무엇인가?

     

    첫째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다. 

    이삭이 자녀들을 축복한 것이 믿음이었는데, 믿음이 있는 사람이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 믿음이 없으면 이런 축복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자신을 어떻게 아는지에 따라 행동한다.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인식하는지에 따라서도 축복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삭은 자신을 어떻게 인식했기에 자녀들을 믿음으로 축복할 수 있었는가? 이삭은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이렇게 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기 존재에 대해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자녀에게 축복할 수 없다. 이삭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되었는가?

    ​

    “(창 22: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창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 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고 계시다. 언제 아브라함을 축복하셨는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렸을 때이다. 이삭은 자신의 죽음 직전에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던 말씀을 체험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나님의 축복의 말이 이삭의 마음에 각인되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되고, 그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다. 즉, ‘씨’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이삭을 말한다. 이삭은 이 말씀을 알아들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실 때 그 말씀이 이삭에게 매우 강하게 와닿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짐을 알게 된 것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복을 계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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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

    아브라함에게 복 주신 하나님께서 직접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삭이 자녀에게 축복한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

    아버지 이삭이 아들 야곱을 축복한 내용이 무엇인가?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축복하신 말씀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말씀과 동일한 것이다. 이것은 이삭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명확히 인식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즉,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이 복의 근원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어떻게 자녀를 축복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복받았는지 알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

    “(출 3:11)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출 4:13)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

    모세도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자기 존재에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누구관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았을 때에도 바울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복음을 위해 자신있게 살았던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것도 자신이 복의 근원임을 알았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믿음의 행위인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어떤 믿음이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이삭과 같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자녀들에게 축복하며 눈을 감을 수 있겠는가?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되겠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신다는 믿음으로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후손을 축복하는 일은 특정한 사람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우리는 복의 근원이고, 우리가 이것을 믿으며 자녀를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삭이 이렇게 자녀를 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신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부모가 되고싶은가? 자녀를 믿음으로 축복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녀에게 전달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권세이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권세로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엄청난 권세를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이 권세로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삭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었다.

     

    둘째로, 이삭의 믿음은 하나님의 뜻 아래 자신의 뜻을 두는 순종의 믿음이었다.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할 때, 이삭은 자기 뜻을 하나님 뜻 밑으로 두었다. 이삭은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내려놓을 줄 아는 결단의 믿음이 있었다.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누구나 에서가 장자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면 에서가 먼저 축복받아야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야곱과 에서’로 표현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삭이 리브가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자녀를 주셨다. 리브가 뱃속의 아이가 싸울 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

    “(창 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

    하지만 이삭은 둘째인 야곱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로 생각하지 않았다. 에서를 더 사랑했다.

    ​

    “(창 25:28)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그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더라”

    ​​

    그래서 이삭은 에서를 특별히 사랑하여 복주기 원했다. 자기의 판단 기준을 가지고 에서를 사랑하고 축복하기 원했던 것이다. 그래서 에서를 축복하려하는 것을 리브가가 알고 야곱을 변장시켜 대신 축복받도록 종용했다. 이삭은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야곱이 에서인 줄 알고 축복했다. 진짜 에서가 돌아오자 이삭은 이렇게 말했다.

    ​

    “(창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가로되 그런즉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너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

    이것을 직역하면 큰 두려움으로 떨었다는 뜻이다. 이 ‘떤다’는 것은 ‘전율했다’는 의미이다. 이삭이 전율하며 떤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큰 뜻을 저버릴 뻔 했다는 것에 대한 전율이다. 아마도 이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에서에게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하나님 뜻에 순종한 것이다.

    살면서 내 뜻과 하나님 뜻이 충돌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만약 하나님 뜻과 내 뜻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뜻 앞에 나를 내려놓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이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내 인생에서 이어주신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경을 넓혀주시리라는 믿음이었다. 이삭의 축복에는 이러한 믿음이 담겨있다.

    ​

    “(히 11: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

    이삭이 바라보던 일은 어떤 것인가? 장차 오는 일이다. 아브라함을 통해 받은 땅의 축복이 있었고, 자손에 대한 축복이 있었다. 그러나 이 축복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축복을 이어받았지만 이 축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신이 잘난 인생을 살았기 때문에 자녀를 축복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자녀를 축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삭이 믿음의 사람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한다. 첫 임지에서 교회 성장에 대한 꿈이 있었으나, 현실 속에서 만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그러면 첫 소망을 다시 가질 수 있는가?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가? 우리 현실에도 불구하고 복의 근원이 되는 꿈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이 꿈은 현실 속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꿈이기 때문이다.

    ​

    “(학 2:3)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자 곧 이 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이 없지 아니하냐”

    ​

    ‘이것’은 현실이다. 현실이 우리 눈에 보잘것없어 보이는가?

    ​

    “(학 2:4)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보잘것없는 현실 앞에 있을지라도 이 꿈을 굳건히 붙잡아야 한다.

    ​

    “(학 2:5)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신이 오히려 너희 중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

    “(학 2:6)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학 2:7) 또한 만국을 진동시킬 것이며 만국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영광으로 이 전에 충만케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 2:9)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

    이 꿈을 지금도 계속 가져야 한다.

    ​

    “(계 7:9)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는 하나님께서 보신 것이다. 이들은 누구인가?

    ​

    “(계 7:13)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이것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피로 사신 참 교회를 통해 이루실 약속이다.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이다. 이 약속에 근거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이 꿈을 꾸어야 한다. 이 소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소망의 근거는 내게 있는 것도, 현실에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다. 이삭은 그 믿음이 있었다. 이삭에게 있는 최고의 믿음은 장차 올 일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삭은 자기 신분에 대한 믿음과 하나님 뜻 앞에 자기를 내려놓을 줄 알았으며 약속을 이루실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다시 확인하고, 내 뜻을 돌이켜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한다. 축복의 통로로 삼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 앞에 이삭과 같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보고 선포하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릍 통해 그 약속을 이루어가실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욱 귀하게 여겨야 한다. 우리 믿음 속에 그 축복을 담아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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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말씀 제목] 비천한 자를 존귀한 자로 (삿11:1-11,29-40)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2년 10월 8일(토) 안식일 예배

    인도라는 나라에는 ‘카스트 제도’라는 뿌리 깊은 신분 제도가 있다. 카스트 제도의 내용은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네 계급으로 나누는데,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가 그것이다. 그런데 네 계급 외에 카스트 제도 안에도 못 들어가는 최하층민이 있다. 이 계층을 불가촉천민으로서 달리트라고 한다. 태생적으로 상호간의 신분 이동은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는 1950년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인도인의 문화 속에 영향력은 여전하다. 이런 신분 제도의 기원은 흰두교의 원시종교였던 브라만교에서 기원했다. 힌두교가 인도의 지배종교로 지속되는 한 인도 사회에 신분 계급 관념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카스트 제도 같은 태생적 신분 제도는 없지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도입한 결과 자본이 계급이 되는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최근 유행어를 보면 시대의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는데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등의 표현들이 자본으로 사람을 분류하려는 씁쓸한 우리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도 쓰면 안 된다. 세상의 가치와 관념에 휘둘리게 되면 우리는 속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의 가치와 기준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관념의 잣대로 나 자신을 평가하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남들도 그렇게 평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나는 오늘날 나의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평가하시는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있는가? 아니면 세상의 가치 기준에 휘둘려서 자신을 불행한 존재로 비하하고 있지 않는가?

    오늘은 비천한 신분의 사람 입다가 사사가 되어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존귀한 자가 될 수 있었던 길이 어디에 있었는지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사사시대 길르앗이란 사람이 기생에게서 낳은 아들이 있었다. 그 낳은 아들의 이름은 입다였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집안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학대받았다. 결국 배다른 형제들로부터 쫓겨났고, 쫓겨나면서 재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떨려 났다. 혈혈단신 돕이란 땅에 거하게 되었는데 어느덧 이곳저곳을 떠돌던 사람들이 모여들어 부랑민의 우두머리가 된다. 이렇게 태생부터 비천한 처지였던 입다에게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하나님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암몬 족속을 보내 괴로움 당하게 하셨고 그것은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암몬 족속이 쳐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길르앗 장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쫓아낸 입다를 찾아가게 된다. 입다에게 전쟁을 수행할 장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는데, 입다는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 신분까지 약속받고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되고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입다에 대한 이 이야기는 세상 속에서 상처와 아픔으로 얼룩진 비천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면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도대체 입다는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천함에서 존귀함에 이를 수 있었을까?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런 것이다.

    첫째, 신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는 명약이다.

    (삿 11:1-2) 『[1] 길르앗 사람 큰 용사 입다는 기생이 길르앗에게 낳은 아들이었고 [2] 길르앗의 아내도 아들들을 낳았더라 아내의 아들들이 자라매 입다를 쫓아내며 그에게 이르되 너는 다른 여인의 자식이니 우리 아버지 집 기업을 잇지 못하리라 한지라』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이 있고 개선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스스로 개선할 수 없는 영역 가운데 태생이란 것이 있다. 태생은 자기 선택이나 노력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입다는 태생이 비천했다. 그런데 그의 고통은 여기에서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배다른 형들로부터 쫓겨났고 자기 몫의 재산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사람이 건실한 인격체로 성장하려면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사랑을 경험해야 한다. 그런데 입다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자라는 낙인과 더불어 가정으로부터 거절당하고 쫓겨나는 상처와 아픔을 경험했다. 본문을 보면 입다의 추방은 한 가정에서가 아니라 한 가문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입다에 대해서 성경은 ‘서자’라고 먼저 언급하지 않고 본문 1절 말씀처럼 ‘큰 용사’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서 ‘큰 용사’란 ‘전쟁의 명수’ ‘싸움의 용사’ 즉 전쟁에 익숙한 자를 의미한다. 아마도 그에게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은사 외에 그의 마음 속에 존귀하게 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들어 있었다.

    (삿 11:9)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데리고 본향으로 돌아가서 암몬 자손과 싸우게 할 때에 만일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 내가 과연 너희 머리가 되겠느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입다의 마음 속에 여호와 신앙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내가 그들과 싸워 이기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이시면’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전쟁의 승패가 내 능력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또 다른 곳에서 여호와 신앙이 발견된다.

    (삿 11:11) 『이에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과 함께 가니 백성이 그로 자기들의 머리와 장관을 삼은지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하니라』

    입다가 미스바에서 자기의 말을 다 여호와 앞에 고했다. 이는 입다가 하나님께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호와께서 전쟁의 승패를 좌지우지한다는 믿음, 여호와 앞에 자기의 말을 다 고하는 사람, 그런 신앙이 있던 사람이 바로 입다였다. 이것이 입다가 비천한 신분에서 존귀한 자가 될 수 있는 첫 번째 비결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비천한 처지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존귀한 자가 되는 예를 많이 발견한다. 그 가운데 역대상에 야베스라는 인물이 있다.

    (대상 4:9)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역대상의 이 ‘야베스’란 이름은 ‘고통’이란 뜻이다. 그 어머니가 고통 중에 낳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태생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거나 산모가 순탄하지 않은 탄생의 비화를 가졌던 것 같다. 그러나 야베스는 성장 후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있었다. 그는 하나님께 자신의 지경을 넓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렸고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입다에게도 야베스와 같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입다의 발목을 잡아 그의 인생을 넘어뜨리지 못했다. 그는 돕 땅에서 여러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는가? 바로 여호와 신앙이다. 신앙에는 이처럼 상처를 극복케 하는 능력이 있다. 신앙을 가진 자는 세상이 자신을 쓰레기 취급해도 ‘너는 내 형상을 닮은 존귀한 자야!’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서자’라고 손가락질해도 ‘너는 세례를 통해 하늘에서 태어난 내 아들이야!’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으로 얼룩진 인생일지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치료되고 회복될 수 있고 존귀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사람의 영혼을 고치는 명약이다. 과거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있더라도 입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로지 하나님만 섬기는 믿음으로 치유받고 존귀하게 되시는 저와 성도님들 되시길 바란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둘째, 신앙에는 원수와 화목하게 되는 복이 있다.

    (삿 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입다가 길르앗 백성의 머리와 장관이 된 과정을 주목하자! 기드온처럼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고 사사로 세운 것이 아니다. 삼손처럼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의 길르앗 족속 장로들이 직접 그에게 나아가 ‘장관’이 되어 달라. ‘머리’가 되어 달라는 부탁으로 사사로 발탁된다. 여기에 숨은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입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렇게 천대하고 내쫓은 자들이 찾아와서 우두머리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입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처럼 나를 힘들게 하고 모욕했던 사람에게 사과받고 화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다. 입다가 그동안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고 그분을 의뢰하는 신앙을 지켰기 때문에 그에게 주어진 일종의 상급이었던 것이다. 창세기에 보면 믿음의 조상 삼인이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다. 그런데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인생의 황혼기에 원수와 화목케 되는 일을 체험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나를 괴롭히던 자들이 나를 찾아와 화친의 악수를 청했던 것이다.

    (창 21:22)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창 26:26-27)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27)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창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이처럼 성도님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원수 관계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미움을 거둘 수 없게 깨져버린 관계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고 올바른 신앙의 길에 가다보면 미래의 언젠가 그가 찾아와 악수하고 화목케 되는 날이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삼인에게도, 그리고 오늘 본문의 입다에게 임했던 화평의 복이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저와 성도님들의 것이 되기를 기원한다.

    (잠 16:7)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셋째, 신앙에는 좋은 성품을 가지는 복이 있다.

    (삿 11:27-28) 『[27] 내가 네게 죄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하나 [28]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의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

    사람은 상처와 아픔을 경험하면 난폭하고 모난 성격이 되기 쉽다. 남을 원망하거나, 환경을 원망하거나, 부모나 태생을 원망하는 자가 될 수도 있다.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인생이 되기 쉽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좋은 은사를 받은 사람도 방탕으로 치달아 인생을 망친다. 태생이나 자란 환경으로 볼 때 입다는 그럴 위험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암몬과 전쟁하기 전에 사신을 보내 담판을 짓는 장면을 보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 좋은 성품의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그는 암몬 족속과 즉시 전쟁을 수행하지 않았다. 먼저 협상을 통해 전쟁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이처럼 입다는 전쟁보다 협상을 원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아마도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성품의 사람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화평케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호와 신앙의 길을 간 입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또 다른 상급이 있었다. 그 상급이란 하나님 닮은 아름다운 성품이다.

    (잠 4:8)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입다와 같은 깊은 상처와 쓰라린 아픔의 과거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계신가? 그렇다면 실망하지 말라. 사람도 환경도 원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섭리로 주어진 것임을 믿자. 결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의 길에 정진하면 비천한 나도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실 것이다. 좋은 성품을 가지고 존귀한 인생을 살게 하실 것이다. 부디 상처와 아픔으로 뒤범벅된 인생의 전쟁터에서 믿음으로 치유받고 승리하시는 입다와 같은 믿음의 ‘큰 용사’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글작성 : 김세한 목자님

    글편집 : 박은우 형제

    https://youtu.be/7LdzDnn3EzU

  •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수규자매 간증

    [성도간증] 전주교회 이수규자매 간증

    할렐루야!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간증할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하심으로 주께서 제게 일하신 날들을 돌아보며 주를 찬양하고 주의 행하심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교회에서는 간증의 자리가 많습니다. 전에는 간증을 하라고 하면 걱정이 앞섰습니다. 간증은 거창한 것을 말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함에도 저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막연히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라고 생각했지 제 일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간증을 하라고 말씀하시면 뭐부터 얘기해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주께서 이루심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행14:17)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제가 간증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나 그 이후나 주님은 변함없이 일하셨습니다. 이를 알게 하심이, 주님의 손길을 선명히 느낄 수 있게 하심이 저의 간증입니다.

     

    저는 5년간 수험생활을 하고 올해 간호직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현재 보건소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결국 합격했기 때문에 간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통한 사람의 대명사입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형통을 success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성공한 사람의 대명사라는 말이겠지요. 그런 요셉의 삶에서 success란 단어가 기록된 부분은 딱 두 군데 있습니다. 노예였을 때, 그리고 감옥에 있었을 때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굳이 노예와 죄수일 때 요셉을 형통한 자라고 기록한 건 성공이란 직업이나 직책에 있지 않고 삶은 살아가는 것,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이끄시는 과정임을 말씀해주시고자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창39:2-3)

    성공이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임을 고백합니다. 어떻게 합격했는지가 아닌 5년간 주께서 저와 함께하신 발자취를 나누고자 합니다.

     

    직업으로 간호직 공무원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단순합니다. 병원은 대개 3교대를 하는데 공무원을 하면 안식일을 잘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2년 정도만 공부하면 될 거라 생각했던 수험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공부를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병원에 다니면서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길이 생각보다 많이 열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무원을 하게 되면 학점이 필요하지 않아 학점 관리를 하지 않았었고 경력 단절인 상태로 병원을 지원하게 되면 제가 만족할 만한 곳에 취업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였습니다. 사실상 저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 아니라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으로는 예배를 드리고자 함이었지만 속마음은 제 욕심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렇게 수험기간은 더욱 길어지고 4년 차가 되었을 때 필기에 합격하고 면접에 떨어지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1배수 합격이지만 동점자가 발생하였고 제가 그 동점자였던 것입니다. 면접에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습니다. 오히려 동점자인 다른 사람을 안타깝게 생각하였었습니다. 그렇게 면접에서 떨어지고 나니 이 길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고 싶지 않던 제 속마음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다다른 것입니다. 공부를 계속 해야하는 지 병원에 가야할지 하는 선택의 기로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택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정말 내게 원하시는 길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끝에 병원이 아닌 계속 학업을 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 욕심으로 시작했던 공부가 끝이나고 주님이 이끄시는 길대로 가겠다는 마음으로 공부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차 수험이 시작되었고 그 해에 합격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병원과 공부에 관한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내려놓음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중에 주님을 선택하느냐를 물어보신 거였습니다. 애써 외면했지만 병원 스펙을 따졌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써왔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 가치를 두었던 것을 회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5년간 공부를 하면서 정말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같은 공부를 하였지만 늘 새로운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다 적지 못할 만큼 주님의 도우심과 채우심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5년의 세월을 통해 얻은 것은 합격이 아니라 세상 문화에 젖어 있지만 물들어 있는지조차 몰랐던 저를 일깨워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5년간의 시절이 헛되이 흘러가게 두시지 않으시고 값진 시간으로 만들어 주심이 참 놀랍고 감사합니다. 제가 합격을 하지 않았더라도 저는 같은 고백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합격을 하게 된 것은 그동안 공부해 놓은 것이 있으니 합격할 때가 돼서 합격한 것도 아니고 사역을 열심히 해서도 아닙니다. 주께서 정하신 때가 이 때였음임을 압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합격을 주실 수도 있으시고 불합격을 주실 수도 있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모든 전쟁의 승리와 패함이 그들의 능력이나 칼과 창에 있지 않았듯 수험에 있어서도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합격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단지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 중 일부임을 보게 됩니다.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제게 하나님 나라에서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놀랍게도 모든 것은 영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그리스도인에게 성공의 정의가 무엇인지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공부를 하면서 사역에 힘쓰는 동역자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공부가 사역을 하지 않는 핑계가 되지 않고, 사역이 공부를 하지 않는 핑계가 되지 않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동역자로 있어 주심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부족했고 여전히 부족한 저를 앞으로도 이끄실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주신 앞으로의 시간들이 더 가치 있고 빛날 수 있길 노력하며 기도합니다. 고난 중에 있을때에도 평안할 때에도 언제나 선하신 신실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제게 주신 기쁨은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

  • [신앙의 향기] 아동반의 솜씨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남녀노소 상관없이 아름다운 향기가 나지요?

     

    어린 줄만 알았던 유치-초등의 아동들 마음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아동들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고백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기, 말씀노트, 분반활동, 그림 같은 작은 증거들마저

    아름답게 변화시키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림 1.>최우영 (초3) /말씀노트

     

     

    그림2.>허예안(초1) /말씀노트

     

     

    그림 3.> 방태민(초3) /분반활동

     

    그림 4.> 이우진(초4) /일기

     

     

    그림 5> 허유겸(5살) / 그림말씀

     

    이후에 소개될 더 많은 작품들을 기대하면서

    아동 뿐만 아니라 청년.장년.노년 성도님들의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많아지는 강남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작성자| 참예수교회 강남교회 김정남

  • [교회행사] 전주교회 사청부를 소개합니다.

    [교회행사] 전주교회 사청부를 소개합니다.

    할렐루야~^^ 전주교회 사청부를 행사 위주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1. 전주교회 사청부 소개

      – 전주교회 신도 중 연령 27세 ~ 43세 까지의 인원으로 구성된 신도회

      – 인원 : 재적 43명, 출석 33명

     

    2. 행사의 목적(월/1회 전체활동 진행)

    • 목적1. 사청부원들의 소속감 및 공동체의식 생성
    • 목적2. 사청부원들 간의 교제와 화합의 시간 마련

     

    3. 전주교회 사청부 행사 사진 및 소감

    • 전체 사청부 인원과 관계형성을 할 수 있는 교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 사역을 맡고 있는 사청부들에게 채움의 시간이 되어 좋았습니다.
    • 관리인원 및 잃은 양들과도 행사를 통해 교제할 수 있었습니다.

     

    3월 – 비대면 레크레이션 (줌)

    4월 – 체육활동

    5월 – 삼계교회 방문

    6월 – 찬양기도회

    7월 – 대면 레크레이션

    8월 – 사청부수련회(MT)

    9월 – 요리만들기 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