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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시지] 성찬례-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새생명으로 사는 성도의 자세(고후5:13~19)

    [복음 메시지] 성찬례-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새생명으로 사는 성도의 자세(고후5:13~19)

    제목: 성찬례–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새생명으로 사는 성도의 자세(고후5:13~19)
    일시: 2025년 10월 26일 가을 영은회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성찬례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거룩한 성례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찬을 행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에게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의식이나 의례적 형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살아갈 것인가라는 삶의 방향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성찬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하는 자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은 사도행전 26장에서 죄가 없음에도 유대인들의 고소로 아그립바왕 앞에 섰습니다. 그는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변호해야 했지만 이때에도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히 증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베스도 총독은 바울이 미쳤다고 말했지만, 바울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정신이 온전하여도 교회를 위한 것인데 이러한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신을 강하게 붙드셨기 때문에 그의 삶이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위한 삶, 교회를 위한 삶으로 흘러갔다고 고백합니다. 그 사랑이 마음을 감동시키고 이끌어서 고난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교회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큰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울이 겪은 수많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자신의 온 삶을 바쳐서 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은 무엇일까요? 왜 바울은 자신의 온 삶을 바쳐서 이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이사야 53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하며, 그분이 찔리시고 상함을 당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감당하신 것입니다. 본래 죄로 인해 고난받고 죽어야 할 존재는 우리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결국 예수님은 죄인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우리도 포함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세상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14절에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둘째 아담’이라고 부르며, 이것이 첫 사람 아담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만드신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이기에, 그래서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도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이 죄를 범하므로 에덴동산에서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 죄가 생겼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 말하며, 죽음은 모든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역시 그와 똑같이 죄 가운데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죽은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말씀합니다. 아담이 첫 번째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첫 번째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신 것도 이 뜻입니다. 예수님이 첫 생명이 되셔서 우리도 그 생명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죽은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의로 인해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모든 사람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내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죽음이 모두를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특별히 세우신 한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첫 사람 아담이 하나님께 직접 창조된 존재이듯,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직접 보내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만드실 때부터 사람이 죄에 빠질 것을 아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하실 일을 미리 예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구속의 사건임을 증거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친히 마련하신 구원이며,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죄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죽음의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이 반영된 우리를 향한 사랑과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사는 삶

    그렇다면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죽는 것입니까? 성경은 세례를 통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고 말합니다. 세례에서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함께 장사되었다가, 예수님의 부활과 같이 새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세례는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 하나님의 구속의 뜻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새 생명을 얻은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새로운 삶의 방향이 있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자기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5)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해 죽으신 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 생명을 얻은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신을 위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로 이 부르심에 따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위해, 그리고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울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새 생명을 얻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인 만큼 우리도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은 곧 우리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욕심과 본성을 따라 사는 삶이 것이기 때문에 결코 유익하지 않으며 오히려 죄와 멸망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우리를 살리셔서 옛 삶 즉 세상 풍속과 육체의 욕망을 따르던 삶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대로, 우리도 육체의 욕심을 따라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풍속을 좇는 삶이며, 이런 삶은 결국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사단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모습이며, 결국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일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는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당연히 그런 삶이 우리에게 유익한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해가 되고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삶이기에 우리가 가장 가치 있고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삶은 하나님을 위한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배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우리는 구원만 받고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하도록’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선한 일은 우리가 가치 있고 도덕적 삶을 살아서 스스로 만들어내는 선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르는 순종의 삶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옛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이전에는 죄 가운데 있어 그리스도 밖에 있었지만, 이제는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과 놀라운 연합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며,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머문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과 한 영이 되어, 그리스도의 생명과 마음, 능력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도 바로 이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모두 행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쫓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내 힘을 합하는 것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려면 그 말씀을 따르고자 하는 마음도 필요하고 실제로 행할 수 있는 힘도 필요하지만 그 힘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힘은 예수님 안에 있으며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고, 성령 안에서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고후 5:18)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인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 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가 되셨던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하나님과 화목된 관계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기셨습니다.

    즉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아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지키고 더 깊어지도록 힘쓸 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도록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이며, 성경이 말하는 가장 복된 삶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23~27)

    주님의 몸과 피를 분별하며 자신을 살피는 성도

    바울은 성찬이 주님께 직접 받은 것이라고 강조하며, 그만큼 성찬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성찬에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신다는 것은 예수님의 몸과 피에 실제로 참여하여 주님과 더욱 깊이 연합하게 되는 은혜의 자리임을 말합니다. 이 떡과 잔은 ‘너희를 위한 내 몸’,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에게 더욱 예수님의 생명이 더욱 충만하게 임하는 효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성찬을 받을 때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합당치 않게 성찬을 받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고전11:27)이기 때문에 그래서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각각 자기를 살피라고 명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 거룩한 예식이기에, 성도는 그 의미를 분별하고 신중하게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찬은 형식적인 성례가 아니라 매우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담긴 주님의 몸과 피를 먹게 되는 참으로 거룩한 성례라는 것입니다. 매번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이것을 귀하게 생각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보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 삶을 살기 위해 다시 결단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찬은 이 결단을 다시 확인하고 새롭게 하는 은혜의 자리입니다.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위해 사는 삶을 더욱 힘쓰는 성도님이 되길 바랍니다.

    유튜브 설교 링크

    글: 최재웅 형제

  • [복음 메시지] 히스기야왕의 기도

    [복음 메시지] 히스기야왕의 기도

    제목: 히스기야의 기도(사 37:1~7)

    일시: 2025년 7월 29일 화요일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히스기야를 통해 본 기도의 참된 자세–

    본문은 남유다의 히스기야 왕 때 아수르 군대가 남유다를 침공했고, 유다의 모든 성을 함락시키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성의 함락을 앞둔 상황에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기도의 참된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먼저 의지하라(1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습니다. 그가 성전으로 간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성경은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지니라.(약 5: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즉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기를 맞으면 힘 있는 사람을 찾아가거나 세상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거의 성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기도하라(1절)

    히스기야가 성전에 가서 기도한 이유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역대하 7장 11절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이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내가 듣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성전을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에 하나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머물러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이 약속을 기억하고 성전에서 기도했고, 성전에 갈 수 없을 때는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통해 드리는 기도 역시 같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곳이기 때문에 귀히 여기시기 때문에 그 교회를 향해 눈과 마음을 두시고, 그곳에서 드리는 기도를 들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겸비하게 기도하라.(1절)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기도하였는데, 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경건한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이처럼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복종하며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할 때, 내 뜻이나 내 주장, 내 고집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자세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주시는 대로, 인도하시는 대로 따르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하라.(2절)

    히스기야는 선지자 이사야에게도 기도 부탁을 합니다. 자신도 기도하지만 하나님의 종에게도 기도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약 5:14)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들에게 기도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라고 세우신 자들입니다. 사무엘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겠다고 말했고, 히브리서 13장 말씀에도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들이 결산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도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고, 함께 은혜를 나눌 때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됩니다.

    환난의 이유를 생각해 보라.(3절)

    히스기야가 기도하면서 말합니다.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사37:3)

    이 말은 현재 상황을 인정하며, 동시에 자신들의 죄로 인해 이러한 상황이 벌어졌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는 이 상황은 단순한 위기가 아닌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책벌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해산할 힘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즉 오직 하나님만이 이 위기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내포합니다. 어떤 위기든지, 어떤 절망이든지, 우리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4절)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기도 부탁하며 한 말 중에 하나님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랍사게는 하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향한 모욕이 견딜 수 없었고, 그것이 가장 큰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다윗도 골리앗 앞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며 분개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하나님이 영광받으시기를 원하는 기도를 해야 하고 하나님은 그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더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한다면 두려워하지 말라.(6절)

    하나님을 의지할 때 가장 먼저 주시는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곧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해도 응답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설교 링크: 히스기야의 기도(사37:1~7)

     

    글| 최재웅 형제

  • [복음 메시지]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

    [복음 메시지]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

    제목: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고전 2:10-16)

    일시: 2025년 4월 25일 금요일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성령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지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시간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지혜가 비밀하다 말하며, 사람의 지혜나 이성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깊고 감추어진 것으로 묘사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여기서 ‘보이셨다.’는 것은 드러내셨다, 곧 감추어졌던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나타내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본래 우리에게 감추어진 채로 존재하였으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분이시기에, 성령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에베소서 3장에서도 동일하게 증거됩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달았다고 말하며, 에베소서 3장 5절에서는 그 비밀이 “다른 세대에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나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곧 이방인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후사가 되고 지체가 되며 약속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이 복음의 신비는,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는 지혜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6절도 이 내용을 더욱 분명히 해 줍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골1:26)

    하나님께서는 이 비밀을 만세 전부터 감추어두셨으나, 이제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통해 나타내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 복음을 전하며, 자신이 깨달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다른 성도들도 함께 깨달을 수 있다고 증거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아들에게는 알게 하지 않았다고도 말하고 있는데 사람의 일반적인 지혜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즉 이 모든 것이 사람의 이성이나 연구, 철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성령의 절대적인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말씀과 교회를 통해 깨닫게 하신다

    또한 에베소서 3장 10절 말씀에 따르면, ‘이 교회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셨다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깨닫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107편 20절에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시고 위경에서 건지셨도다”라고 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보내셔서 치유하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는 악인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을 잃을 뻔한 사실을 ‘자신이 거의 실족할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실족하려고 했지만 실족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 그들의 결국이 심판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실족할 뻔했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도 때로는 세상의 불의를 보며 의문이 생길 수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공의와 뜻을 올바로 알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믿음을 지키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시편 기자처럼 뜻을 알지 못하면 실족할 수 있으며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도 예수님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해하지 못해 넘어질 뻔했습니다. 어려운 상황 자체보다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 믿음이 흔들립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를 통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모르겠다면 성령을 통해 주시는 말씀, 그리고 교회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교회로 나가야 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더 열심히 기도할 때 우리는 넘어질 수 있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없이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없다

    고린도전서 2장 11절은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1)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정, 즉 하나님의 뜻과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만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마치 사람의 속 사정을 그 사람의 영 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뜻도 성령 외에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정, 즉 하나님의 뜻과 생각을 하나님은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담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그 뜻을 성경에 기록하셨지만, 이 말씀의 깊은 의미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참된 의도는 인간의 이성이나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문자적 표현 즉 글의 표면적인 의미는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그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은 알 수가 없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중에는 성경을 아주 많이 읽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우리 참예수교회의 진리의 말씀과 구원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 그런게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생각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담겨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상식과 지혜가 아닌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그 말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은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기시고 깨닫게 하십니다. 베드로후서 2장 21절에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에 의해서 기록됐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감독을 받아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성령의 성령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람들을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성령으로만 깨달을 수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닫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많은 것들이 있고 지금도 끊임없이 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성령의 도우심 없이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고, 우리의 영적인 눈을 밝혀주셔야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구원의 영광을 이해하고 감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7~18절에서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이미 성령을 받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바울은 더 깊은 지혜와 계시의 영, 그리고 마음의 눈을 밝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성령을 받았어도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역사하지 않으면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깨닫지 못할 수 있고, 반대로 영적인 눈이 밝아져서 신앙에 대한 소중함과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될 수 있도록 끊임없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말씀을 바로 분별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2장 13절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에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성령이 인도를 해 주셔야만 비로소 우리가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자로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도에서 말씀을 증거할 때 반드시 성령이 역사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이 그 안에 역사하셔서 말씀을 전할 때도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말씀을 증거할 수 있게 하시고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성령의 감동을 통해 말씀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으로 기록되었기에 성령의 가르침으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6절은 무식하고 굳세지 못한 자들이 성경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합니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사람의 생각이나 기준으로 해석하려는 자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우리 참예수교회는 성령을 통해서 말씀을 해석하기 때문에 오류가 없는데 일반 교회 같은 경우는 이렇게 하지 않다 보니까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 3장 10절 말씀에 주의 날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한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주의 날’ 하면 일반교회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게 주일입니다. 계시록 1장 10절에도 ‘주의 날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래서 계시록이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의 말씀인 만큼 이것을 근거로 마지막 때에도 ‘주의 날’, 즉 주일을 지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주의 날’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억지로 말씀을 푼 결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잘못 이해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육에 속한 자 對 신령한 자

    고린도전서 2장 14절은 육에 속한 자는 하나님의 일을 미련하게 여기며 깨닫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 말씀에 십자가에 도를 미련하다고 여기는 즉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 혹은 성령 없이 세상의 가치관으로만 살아가는 사람인 이방인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였지만 육에 속한 이방인처럼 살아가게 되면 점점 영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신령한 자는 육에 속한 자와 반대가 되어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모든 것을 영적으로 분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하나님이 주신 생각인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구별할 수 있게 되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고전 2:15)

    이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는 하나님의 기쁨이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삶이 됩니다. 결국, 이는 곧 성령 충만한 삶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삶

    고린도전서 2장 16절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 2:16)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수도와 같은 삶, 즉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5절 말씀에서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며,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님의 삶을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며 말씀과 기도에 힘쓸 때, 우리는 점점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설교링크: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지혜

    글: 최재웅 형제

  • [복음 메시지] 십자가로 인한 고뇌와 순종

    [복음 메시지] 십자가로 인한 고뇌와 순종

    제목: 십자가로 인한 고뇌와 순종 (요12:27-33)

    일시: 2025년 2월 1일 안식일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마음은 고통스럽고 괴로웠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27절)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 마음이 민망하다고 말씀하시며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눈앞에 두고 마음의 고통과 괴로움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고뇌하였지만, 이때 예수님은 많은 기도를 통해 시험을 이기고 결국 순종하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기도 생활의 필요성

    이처럼 사람이 정말로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러우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생깁니다. 때로는 우리가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생기는데 성령을 받은 우리는 그럴 때 성령을 의지해서 기도하면 성령이 우리를 대신해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제자들에게도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 역시도 아주 힘든 상황이 될 것이고 이에 따라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원이라도 육신이 약하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마음은 정말 원하는데 육신이 약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더라도 의지가 약해서 실행할 수 없게 되는 지경도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몸이 너무 아프게 되면 하나님께 의지하여 기도하고 치유와 회복을 구하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때로는 불평과 원망으로 이어지는 시험도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처럼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 마음이 약하고 육신이 약해서 우리가 시험에 들 수 있는 상황이 많이 발생하지만, 이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셔서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우리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 속에서 계속 지게 되어 사단의 시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와 성령을 통한 기도의 중요성

    예수님의 기도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27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전에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 때문에 너무나 고통스러우셔서 이때를 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지만, 지금은 이거를 지금 감당하시며 순종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기도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좋은 교훈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순종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가운데 내가 알지 못하더라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로마서 8장 27절 말씀에서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 성도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하나님 뜻대로 기도하신다는 뜻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서 하나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역사하시며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때로는 마음과 힘이 약하여 있다가도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도하고 나면 힘이 생기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 행하려는 생각이 생깁니다. 이것이 성령의 도우심이고 그러므로 성령 받은 성도들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고 계속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삶

    예수님께서는 우리 믿는 자들의 본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한 것은 우리 믿는 자들이 그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을 닮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가신 모습대로 살아가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가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의 영광을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면 그 인생은 분명히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도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우리 인생은 우리를 스스로 높인다고 해서 높아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셔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고 싶다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복한 삶을 주셔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고 싶다고 해서 내가 복을 쫓아가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야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나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정말로 복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 뜻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고 바로 응답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그런 삶을 살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원하시는 삶입니다.

     

    솔로몬을 통해 살펴본 하나님의 영광을 구한 삶의 결과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무엇이든 구하라고 하십니다. 이때 솔로몬은 지혜를 주셔서 하나님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그런 재판을 잘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구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솔로몬이 구한 것이 주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솔로몬은 자신이 재판을 잘하여 백성을 잘 이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였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도록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 지혜를 전에도 후에도 없을 만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솔로몬이 구하지도 않은 부와 영광도 함께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려고 구했고 행하려는 마음 또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는 삶을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망에서 건지러 오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구했을 때 하늘에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는 소리가 나왔습니다. 그러자 어떤 사람들은 이 소리가 우레가 울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했다. 여러 말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소리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희를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되었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31절) 하고 말씀하시는 데 이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가지시게 되고 그렇게 되면 세상의 심판이 일어나서 결국 세상 임금인 마귀가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므로 세상의 왕인 마귀가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히 2:14~15)”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마귀를 없애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경은 사단을 가리켜 사망의 권세를 잡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사망은 죄의 대가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의 대가인 사망을 받아야 하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면하게 하려고, 즉 사람들이 죄의 종이 되지 않도록 이 관계를 끊기 위해 하나님께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시므로 우리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단이 죄로 인한 죄의 삯인 사망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제부터는 사단이 세상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왕이 되십니다. 이것을 이루는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죄 사함의 은혜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므로 죄에 대한 삯을 다 지불하게 되어 이제는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죄에서 다 벗어난 것일까요? 그건 아닌 겁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일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 권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은혜를 주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여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1:13~14)”

    죄 사함, 즉 구속의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풀어졌다는 뜻으로 죄에서 풀어졌다는 뜻입니다. 풀어졌다는 것은 흑암의 권세에서 있던 자를 건져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삶

    그런데 우리는 이 죄 사함을 어떻게 받는 것입니까? 세례를 통해서 받습니다.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 구속받아서 죄와 사망의 권세인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의 권세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니 죄 사함 받은 성도들은 더 이상 이제 죄의 종노릇 하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여전히 죄의 종노릇 하는 죄의 권세에서 나오지 못하는 그래서 죄에서 얽매이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회개를 통해서 다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죄를 사함 받는 것이 예수님 안으로 들어갔으니 예수님 안에 있어야 우리가 계속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30: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너희가 만일 하나님께서 쫓겨나서 이방 나라 안에 거할 때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지 못하고 화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돌아올 때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키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 있든지, 이스라엘 땅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도저히 인간으로 돌아올 수 없는 그런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돌이키셔서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 욕심을 따라서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이 은혜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여 애굽의 땅이 아닌 이스라엘의 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의 진정한 모습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계속해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로 계속 돌아오는 삶을 사는 것인 우리가 해야 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안에 거하게 되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셔서 그분의 삶과 더 가까운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힘쓰시는 우리가 모두 되길 바랍니다.

     

    설교 링크: 십자가로 인한  고뇌와 순종

     

    글| 최재웅 형제

  •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제목: 구원의 핵심 진리, 안식일

    일시: 2024년 10월 25일 안식일 저녁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1. 안식일이란?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은 무슨 날일까요? “안식”은 ‘자신이 하던 일을 끝내고 쉰다’라는 의미입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입니다.

    (창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뿐 아니라 창조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사람의 명령이 아닌 창세 때의 하나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기록하는데, 성경이 기록하는 안식일은 일곱째 날, 곧 토요일입니다. 정확히는 저녁부터 하루를 세는 성경의 기준으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에 해당합니다.

     

    2.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

    성경은 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장의 내용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5:12~15)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민이 되도록 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동일한 두 말씀에서 각자 창조와 구원을 말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은 곧 창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애굽(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됨을 의미합니다. (사43:2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백성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키시니 하나님 백성보다 안전한 상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길 바라십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영육 간에 주시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킬 때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특별히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할 때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영의 양식을 채우십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님이 한 주 동안 힘들었다가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힘을 얻거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넷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 곧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이를 하나님 백성인 증거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31:14).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거룩함을 잃어서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즉 안식일은 거룩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날로 이를 지키면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이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 세상에 살 동안에 안식일을 통해 그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일에는 성도가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하나님 안에서 해결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식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더욱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일요일, 즉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율법의 일부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고, 도리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의미 있으므로 주일(일요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갈3:15-17)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말씀은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나중에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안식일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면,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주신 율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물론 율법 속에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방법에 대한 규례가 있고, 이러한 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은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그 자체는 율법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직접 주신 다른 말씀들도 오늘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일도 동일하게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에 갔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사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아주 중요한 안식일이 다른 날로 변경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성경에 언급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지킨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막7: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섬기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오늘날 성탄절, 부활절 등 성경에 없는 절기를 지키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은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계명을 우선하는 교만함에 진노하십니다.

     

    마무리하며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위와 같은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안식일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 주신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오다은 자매

  •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제목: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일시: 2024년 8월 31일 안식일 오후 ‘열린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아름다운 소식이 있을 때 우리는 전하고 싶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아름다운 소식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왜 아름다운 소식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바벨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시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사40:15)

    이스라엘이 바벨론 압제 속에서 사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권세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단은 내 생각, 내 욕심대로 살게 함으로 평안도 없고 두려움과 불안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다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행26:17-18)

    둘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다운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목자같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11)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 속에 살아갑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주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려 사랑하셨습니다. 그 선하신 목자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니 우리는 가장 선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그 은혜를 경험하고 더 나아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1:13-14)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36:27)라는 말씀처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고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7장에는 문둥병자의 아름다운 소식이 나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성 밖으로 나와야 아름다운 소식을 접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만의 견고한 성을 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자기만의 생각, 뜻, 사상, 감정, 경험 등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힘써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자 되길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메시지]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복음메시지]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제목: 목마르지 않는 물 (요4:3-18)

    일시: 2024년 4월 13일 안식일 오전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은 물을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 물은 어떤 것이며 또 어떻게 해야 먹을 수 있는지 함께 살펴보고 은혜를 얻도록 하겠습니다.

    #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가시다

    예수님께서 유대를 떠나서 갈릴리로 가실 때 사마리아로 통과하려 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사마리아 땅임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우회해서 갑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부정한 사람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사마리아는 구약시대의 북이스라엘의 수도였습니다. 그러나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 이곳에 이방인들을 거주하게 됨으로 혈통적으로 섞이게 됩니다. 혈통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유대인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자신의 동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꺼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 사마리아로 가시겠다고 하십니다. 바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가시려 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찾으십니다. 사복음서 보게 되면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주 식사를 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막2:17)”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바로 영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즉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자는 소외 받는 사마리아인들 가운데서도 가장 소외받는 자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사마리아 여자를 일부러 만나 복음을 전하려 하십니다.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여기시는 자시니라(약5:11)”

    # 행로에서 곤하신 예수님을 살펴보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한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정이 힘드셨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힘든 길을 기꺼이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들을 건져낼지라(겔34:11)”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목자가 자신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찾고 찾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때로는 양이 골짜기나 절벽 위, 혹은 아주 위험한 곳에 있을지라도 목자는 그 양을 찾기 위해서 기꺼이 간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예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애쓰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 그리고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가 나옵니다. 공통적인 것은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주님께서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양들을 찾으시되 계속해서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계속해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심으로 우리가 이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피곤하여 우물곁에 앉으신 모습은 또한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내려놓으시고 낮아지신 예수님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사40:28)”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피곤치 않고 곤비치 아니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와 똑같은 피곤을 느끼시며 육신의 연약함 가운데서 계셨습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케 하고 연약한 우리를 강하게 하시고 죄 가운데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일부러 가난하게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전8:9)”

    # 예수님이 전도하시다

    9절에서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심을 듣고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냐면서 핀잔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넸을 때의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짐작하셨겠지만 이렇게 말한 것은 그녀를 전도하려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상대방은 불편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라(딤후4:5)”는 말씀처럼 복음을 전하는 과정 속에 고난은 불가피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후의 내용을 보게 되면 복음을 받아들인 사마리아 여자가 기뻐하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10절)”고 말씀하십니다.

    # 하나님의 선물, 성령을 말씀하시다

    그럼 여기서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일까요? 바로 성령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 베드로 사도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사도들이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본 시몬이 돈으로 이러한 권세를 사려하자 베드로 사도가 “내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을 주고 살줄로 생각하였으니…(행8:20)”라며 책망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성령을 가리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하나님의 선물도 바로 성령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너무나도 좋은 것임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시면서 또한 생수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생수는 살아있는 물, 곧 생명수를 의미합니다. 성령은 바로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주는 그런 물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는 사막의 떨기나무 같아서 좋은 일의 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광야 간조한 곳, 건건한 땅, 사람이 거하지 않는 땅에 거하리라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찌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렘17:6-8)”

    여기 말씀을 보면 두 종류의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 즉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은혜를 받는 사람과 사막의 떨기나무처럼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물가에 심긴 나무는 언제든지 물을 공급받아 더위가 올지라도 두렵지 않고 잎이 청청하며 가을에도 걱정이 없습니다. 마치 더위가 오더라도 그 뿌리를 강변에 뻗쳐 물을 공급받는 것처럼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어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은혜를 성령을 통해 주십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성령이 우리 가운데 있으면서 이러한 물과 같은 은혜를 공급해 주십니다.

    11-12절 말씀을 보면 사마리아 여자는 예수님의 영적인 진리를 잘 못 알아듣습니다.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생수를 얻느냐”고 말하며 예수님에게 야곱보다 큰 자인가를 묻습니다. 니고데모 또한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거듭남의 진리를 말했을 때 “어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 물으며 이해하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에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뜻을 지극히 낮은 우리 사람들이 알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세상에 오셔서 진리를 알게 하셨습니다. 그 진리를 듣고 깨달은 자들이 다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도이고 이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샘물 같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13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보다 더 분명하고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 우물을 통해 물을 먹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려니와 예수님이 주는 물을 먹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샘이 되고 그 샘을 통해 끊임없이 생명수가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수를 마시기 위해 먼저 우리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지 않고는 이것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7:38)”

    #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다

    성령을 받은 후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증인이 되도록 성령을 주셨고(행1:8)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게 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됩니다(요3:34). 그럼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믿는 자 안에 성령으로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삶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고 왜 끊임없이 성령을 부어주시는가 그 이유를 분명히 안다면 오늘 우리 삶 속에서 샘솟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경험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게 바로 성령의 은혜요, 성령의 능력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우리의 작은 삶의 습관들이 결국은 우리 삶에 영향을 줍니다. 평상시에 내 생각대로 내 감정대로 내 마음대로 행하는 삶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삶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런 삶을 살게 될 때 우리 삶이 계속적인 성령의 은혜 가운데 있게 되고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라는 말씀처럼 내 안에는 내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삶을 내 마음과 뜻과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성령을 충만히 채워주십니다.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끊임없이 성령의 은혜를 공급받을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힘쓰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 안에 끊임없이 성령이 샘솟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백현 자매

  • [교회행사]가을영은회

    할렐루야!  지난 10월27일부터 3일간  “건강한 신앙” 이라는 주제로  장종규 목자님(안양교회)을 모시고 가을 영은회를 열었습니다. 

    이번 영은회도 어김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  듣고 행하라➀  요나의 회개➁  나그네 같은 성도의 삶➂  귀한 향유를 부은 마리아➃  가룟유다의 배반➄  마지막 시대의 경고의 말씀➅  건강한 교회➆  세족례 & 성찬례➇  등 은혜의 설교 말씀을 통해서 신앙을  바로 세우고 영적인 갈급함을 채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진유진&진리영 자매님이 세례 증서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 중 언니인 진유진 자매님이 성령을 안 받았었는데 이번 영은회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또한 구도자 6명과 교회 출석이 잘 안 되었던 성도 7명이 참석하셨고, 타 교회 소속이시지만 잃은 양이셨던 자매님 한 분도 참석을 하셔서 귀한 영의 단비를 흠뻑 맞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다른 교회 형제 자매님들도 많이 참석해 주셔서 즐거운 교제의 시간도 되었습니다.  청년들의 받은 바 은혜를 간증하는 간증회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여기를 눌러주세요(영은회 설교 링크 바로가기) 

     

  • 그리하면 형통하리라(수 1:1-9)

    그리하면 형통하리라(수 1:1-9)

    참예수교회 거제교회 화요일 저녁예배

    일시 : 2022. 02. 01.

    장소 :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다공2길 27

    설교자 : 장종규 목자

    제목 :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주제성구 : 수 1:1-9

    [1]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것 같이 너의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본이 되는 교회(살후 1:3-5)

    본이 되는 교회(살후 1:3-5)

    참예수교회 거제교회 안식일 오전예배

    일시 : 2022. 01. 29.

    장소 : 경상남도 거제시 연초면 다공2길 27

    설교자 : 장종규 목자

    제목 : 본이 되는 교회

    주제성구 : 살후 1:3-5

    [3]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며

    [4] 그리고 너희의 참는 모든 핍박과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을 인하여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함이라

    [5]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으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