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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메시지] 인내로써 경주하며 (히 12:1~3)

    [복음메시지] 인내로써 경주하며 (히 12:1~3)

    [말씀제목] 인내로써 경주하며

    [본문말씀] 히 12:1~3

    [설교자] 윤석원 목자님

    [설교일] 2026/7/18 (토)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사람이 구원으로 가는 길에는 거룩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 거룩하게 되는 것, 즉 성화가 곧 구원받는 길이다. 본문은 그 성화의 여정을 우리가 인내로써 달려가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성화의 길을 인내하며 가야 하는 이유는 그 길에 많은 어려움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

    본문에는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말한다. 이 증인들은 성경 속의 많은 인물들 뿐만 아니라 지금 현재 우리의 옆에서 함께하는 형제자매들도 가리킨다. 이들은 모두 각자 자신의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자신들의 삶으로 성화의 여정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함께 이 길을 걸어가는 증인들을 바라봄으로써 우리 자신의 성화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성화의 길은 나 혼자 가는 것이 아닌 성도 모두가 다같이 가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또한 이 길의 끝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본문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 한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달려가는 이유는 그곳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맞아주시고 인정하여 주시는 것이 우리의 인내의 이유이며 목적이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향해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맞이해 주실 것이다.

  • [복음메시지] 심령에 매임을 받아 (행 20:22~24)

    [복음메시지] 심령에 매임을 받아 (행 20:22~24)

     

    [말씀제목] 심령에 매임을 받아

    [본문말씀] 행 20:22~24

    [설교자] 윤석원 목자님

    [설교일] 2026/5/9 (토)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영적인 성장의 최고점은 무엇일까? 육적인 성장의 최고점이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듯이, 영적인 성장의 최고점은 전도이다.

    나의 신앙을 챙기는 데에서 벗어나 남의 신앙을 돌보아주는 것, 그것이 영적인 성장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이 육신의 자녀를 돌보는 일도 쉽지 않지만, 영적으로 다른 사람의 신앙을 길러주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동기부여가 있다면 할 수 있다. 사람이 살아가며 하는 노력엔 모두 동기가 있듯이, 우리의 전도하는 일도 동기부여를 받는다면 해낼 수 있다.

     

    그렇다면 본문의 바울 사도는 어떤 동기부여를 받았던 것일까?

    바울 사도는 전도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떠나기 전,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자신이 심령에 매임을 받았다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성령이 충만한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마음이 바울의 앞에 놓여진 결박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명을 내던져가며 전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마음 속에 의무감과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이방인의 전도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러주셨고, 그러므로 자신은 복음을 듣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빚을 진 자이므로 반드시 복음을 전해야한다는 의무감과 그리고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면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말씀을 믿고 천국이 어서 오기를 소망하며 전도한 것이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 사도는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성령 충만, 그리고 자신의 의무감과 자신의 소망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도는 선한 이기심으로도 행해질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가 되므로, 가장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인 것이다.

    즉 남을 위하는 것이 또한 나를 위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가 바울 또한 느꼈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서 전도에 힘쓰는 삶을 살게 되기를 바란다.

  • [복음메시지] 빚 진 자 (롬 1:14~15)

    [복음메시지] 빚 진 자 (롬 1:14~15)

     

    [말씀제목] 빚 진 자

    [본문말씀] 로마서 1:14~15

    [설교자] 윤석원 목자님

    [설교일] 2026/2/14 (토)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14‬-‭15‬ ‭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빚을 진 자라 말합니다. 왜 바울 사도는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는 이방인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린도전서‬ ‭15‬:‭10‬ ‭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사도행전‬ ‭9‬:‭15‬

    바울 사도는 자신의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께서 바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 것임을 나타내지만, 또한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해 택하신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모르는 이방인들의 존재가 자신이 구원받은 이유 중 하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바울 사도는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빚을 진 자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런 귀중한 자리에 우리를 불러주신 것일까요?

    그 은혜에는 우리를 사랑하셔서도 있지만, 우리가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인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 사도처럼 세상에 빚 진 자들인 것입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복음을 모르는 세상의 존재로 우리가 구원받았기에, 우리는 반드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우리가 빚을 갚는 길입니다.

    전도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선포하며, 우리의 빚을 갚아나가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 [복음 메세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복음 메세지]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23.10.28 안식일 오전 윤석원 목자님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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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생활은 결국 죄와 싸우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국에 가서도 우리는 죄와 싸우게 될까? 타락의 가능성이 있을까?

     

    죄 = 하나님에게서 벗어난 것.

     

    실질적으로 창조주이신, 전능하신 하나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면 피조물은 반드시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로봇으로 만든 것이 아닌, 감히 그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천국에 가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있을까? “있다.”

    그렇다면 거기에서도 죄를 지어 재타락할 수 있는 걸까? “전혀 없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 관계 (화목하냐, 불화하냐)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을 때 그곳(집, 교회, 학교 등)이 천국이 됨.

    (출 19:22) 하나님과 불화하면 하나님은 죄를 싫어하시기 때문에 돌격을 당하게 됨. (진노를 받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진노를 받아야 했던 대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바뀌게 됨.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됨)

     

    단순히 성경 통독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진 않음. 어떠한 계기를 통해 더 고차원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 (ex. 욥)

     

    ?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를 부르신 걸까 ?

     

    1. 우리를 단순히 적당히 착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나를 하나님과 같은 존재,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르심.
    2.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지 않으면 말세의 죄의 유혹을 견디지 못함.
      -> 나중에는 성막만 무사한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소와 지성소만 무사함. 그곳을 제외한 나머지도 밟히게 됨.

     

    즉,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결국 떨어져 나갈 수밖에 없음.

     

    ? 어떻게 하면 더 깊은 관계를 만들 수 있을까 ?

     

    관계의 종류

    1. 원수 같은 아들
    2. 종 같은 아들
    3. 친구 같은 아들 (요 15:15)
    4. 신부 같은 아들 (계 21:2) = 교회의 마지막, 완전한 모습. =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

     

     

    <웬수 같은 아들>

     

    (눅 15:11) 아비에게는 2명의 웬수 같은 아들이 있었으나, 둘째는 재산을 미리 상속받고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여도 방탕하게 쾌락을 추구하며 살다보면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밖에 없음.

     

    세상을 사랑해 세상으로 향했다. = (요일 2:15-16) 세상의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했다.

    => 웬수 같은 아들.

     

    둘째는 집 나간 웬수라면, 첫째는 집 안의 웬수였다.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첫째는 헤아리지 못함.

    첫째가 웬수인 이유는,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고 은혜임에도,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함. (아버지와의 관계가 깊지 못함)

  • [복음메세지] 존귀한 자의 기도

    [복음메세지] 존귀한 자의 기도

    2023.9.16 안식일 오전 윤석원 목자님 설교

     

    ㄴ이미지를 클릭하면 해당 설교 영상으로 이동합니다.

     

    존귀하다: 지위나 신분이 높고 귀하다.

    세상에서의 존귀함은 자존감, 학벌, 직업, 명예 등으로 귀하다는 것을 나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존귀한 자.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셨고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아주셨기 때문.

     

    “존귀함“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게에서 비롯되어 나에게 덧입혀지는 것.

    존귀함 ≒ 무겁게 여기다. 영광.

     

    (삼상 2:30) “존중히” = 무겁게 여기다.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무겁게 여기신다는 것.

    => 즉, 존귀함은 세상물질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 시인할 때 비로소 우리에게 영광이 됨.

     

    ***

     

    없으면 더 불편한, 덜 불편한 손가락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더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있다. (ex.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 모세, 요셉, 바울…)

     

    ?특별히 존귀함을 받는 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대상 4:10)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받으심. -> 하나님께서 야베를 더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

    야베스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존귀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바로 들어주심.

     

    ?야베스는 어떻게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쌓았고, 야베스는 하나님께 뭐라고 기도했을까?

    (대상 4:9) 야베스의 어머니는 고통 속에 야베스를 낳음 -> 그 고통과 결핍 속에 야베스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함.

    우리의 인생에 고통이 없는 것도 좋지만, 이 고통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진다면 그 고통도 복이 됨.

    (대상 4:10) 야베스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

     -“복에 복” -> 히브리어의 문법. 필연적 강조.

     -“지경을 넓히다” -> 자신의 물질적인 것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확장.

     -“환난” -> 악한 일.

     -“근심” -> 수고 (대상 4:9) = 고통이 없게 해달라. or 내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게 해달라.

    => 이 기도들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즉시 허락된 기도.

  • [복음메세지] 나는 죽으나

    [복음메세지] 나는 죽으나

    2023.4.22. 안식일 오전. 윤석원 목자님 설교

    [나는 죽으나] 창 50:24-26

     

    https://youtube.com/live/LIbgx5QpR5M?feature=share

     

    종교인은 사후세계도 준비하지만, 막상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서 하늘에 있는 금고를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창 5) 하나님께서 데려가 하늘로 승천한 에녹을 제외하곤 사람은 모두 죽었다.

    하지만, 죽음은 비통하고 애통하기만 한 일은 아니다. 때로는 기쁜 일이기도 하다.

     

    (창 5:1-2) 이 구절은 의미 없이 쓴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심을 한 번 더 작성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알려준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담이 자신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음)

    => 하나님의 가정,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간다는 생명의 족보인 것이다.

     

    *이 생명의 족보에서의 죽음: 모든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의 품에 돌아간 것.

    하지만, 창6 이후로 하나님의 백성이 육체가 되어버려 낳는 걸로 하나님의 형상을 계승할 수 없게 됐다.

     

    ? 그래서 어떻게 했나 ?

    “한 사람”을 선택해 하나님의 말을 듣고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갈 수 있게 하심.

    그 첫 번째 사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그래서, 아브라함이 후처를 두고 많은 자식을 낳아도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삭 1명

     

    (창 25:8) 열조: 백성, 국가. / 즉,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고 이어받은 조상에게로 돌아감.

    (창 35:9) 이삭도 그 열조에게로 돌아감.

    => 하나님의 사명을 모두 완수하고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감.

     

    (창 50:25)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음에도 하나님께서 약속한 나라에 들어갈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

    요셉의 이런 죽음에 대한 평온함과 소망은, 야곱에게서 전승된 것. (창 40:21)

    (수 23:14) “온 세상이 가는 길”: ‘나는 죽으나’의 일꾼 ver.

    (왕상 2:1-2) “온 세상이 가는 길” -> 하나님이 모든 일을 완수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말.

     

    여호수아: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정복해 이스라엘 백성이 살 수 있도록 한 사람.

    다윗: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완성한 사람. (나일강 ~ 유프라테스강)

     

    이 여호수아와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 그 뜻을 완수한 사람들.

  • [복음메세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복음메세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2023.1.21. 안식일 오전. 윤석원 목자님 설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막 11:12-26

     

    https://youtu.be/8kg_Z7rI1jM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오셔서 한 일은 크게 2가지이다.

    1. 무화과 나무 저주
    2. 성전 정화

    해당 본문의 내용은 무화과 나무 – 성전 정화 – 무화과 나무로 진행되는 샌드위치 구조이다. 우리는 흔히 이 내용들이 각각의 교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무화과 나무 내용에서는 “열매 맺지 못하는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다.”

    성전 정화 내용에서는 “하나님의 집에는 사적인 이익이 들어와서는 안된다.”

    두 번째 무화과 나무 내용에서는 “기도할 때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는 교훈을 갖고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사실 이 내용들은 전부 하나의 큰 교훈도 갖고 있다.

     

    바로, “새로운 시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교훈”이다.

     

    세상에서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B.C (Before Christ) / A.D (Anno Domini)로 나눈다. 이것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시대이다.

    교회에서 시대를 나누는 기준은 구약/ 신약으로 나눈다. 이것은 약속, 즉, 은혜의 시대라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본문에서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 제사의 시대에서 은혜의 시대로 바뀔  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 본문을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화과”라는 열매의 특징을 알아야 한다.

    무화과 나무는 1년에 5번 정도 열매를 맺으며, 때에 따라 열래는 무화과의 종류도 다르다. 마치 우리가 먹는 사과의 종류도 다양하듯 (풋사과, 홍옥 등) 무화과도 수확하는 시기에 따라 이름과 맛이 전부 다르다.

    본문에서 첫 번째 무화과 내용 때, 예수님께서 무화과를 찾으시던 시기는 (그 당시 기준) 3~4월 경으로, 그 당시 무화과는 파게(Phage)라고 불렸다. 이 파게는 겨울이 끝나고 맺는 첫 열매이기에 맛과 크기 등으로 봤을 때 상품성이 떨어졌다. 그러면 이 열매를 따야 더 건강한 열매가 나오겠지만, 이 열매를 따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남겨놓았다. (연약한 사람들을 위해 밀 이삭과 밭의 모퉁이를 수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에서 이 파게를 찾으셨다.

    (막 11:13) 이 말씀에서 말하는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다”라는 말씀은, 파게 이후에 나오는 맛있는 열매인, 테에나(Thaena)의 때가 아니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파게가 열려있어야 할 때에 이 파게를 찾으셨지만, 나무에는 파게가 없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나무를 저주하신 것이다.

     

    이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고,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테에나도 아닌, 작고 상품성도 떨어지는 파게를 원하셨지만, 그 파게마저도 없었다는 것이다.

    (막 11:13) 파게가 열리는 시기에 파게를 얻지 못하셔서 그 시대를 저주하시고, 예수님을 통해 다음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내용으로, 성전 정화 때에는 보통 이렇게 성전에서 온갖 장사를 하거나 악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그 장사꾼과 사는 사람을 꾸짖는 게 아니라 윗사람들을 꾸짖어야 할 텐데 왜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과 사는 사람들을 꾸짖으신걸까?

    심지어 이 장사는 제사를 잘 드리기 위해 했던 열심이었다. 이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전국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였고, 그 때는 자동차도 없었기 때문에 몇날 몇일을 걸어서 왔는데, 그 기간 동안 데려오던 제물이 병에 걸리거나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조금 더 편하게 제사를 드리고자 장사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 방법이 하나님의 성전을 망친 것이다. (요 2: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사를 청산하고 성전된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걸 알려주는 것이다.

     

    (막 11:17) 하나님의 성전은 특별한 사람만이 아니라 “만민” 이 기도하는 집이었다. 이 말씀은 (사 56:6-7)에도 나온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휩싸여 자신들이 선택받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상을 엎으신 것.

     

    그리고 마지막 두 번째 무화과 내용에서, 

    파게를 얻을 수 있는 시대는 끝났고, 이제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 되어 기도로 하나님께 직접 갈 수 있게 됐다. =>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참고. 요 4:21-23)

     

    (요 14:12)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십자가를 지신 일이고,

    우리가 할 더 큰 일은 말세의 하나님의 교회를 완성시켜 가는 일이다.

  • [복음메세지]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복음메세지]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마가복음 6장 45~56절 말씀

    https://youtu.be/9Fjy4il_Yz0

    본문 말씀도 친숙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던 사건과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으셨던 사건 모두 유명한 말씀이다.

    이 말씀을 들을 때 교훈도 함께 들어봤을 것이다.

    인생이 마치 항해와 같은데 인생길을 걷다 보면 바람을 만나고 풍랑도 만난다.

    이 바람과 풍랑은 고난을 말한다.

    고난을 만날 때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고,

    예수님을 믿으며 이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는 적용을 삼는다.

    이 본문 말씀을 볼 때는 이 부분만 보는 것이 아닌 이 본문의 앞 뒤 전체적인 배경 흐름을 봐야 한다.

     

    막 6: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풍랑 (고난)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얘기를 하신다.

    맥락적으로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

    막 6:45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해서 보내신다.

    왜 재촉하셨을까?

    요 6:14-15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

    우리 민족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지도자로 예수님을 삼겠다는 것이다.

    임금=정치적 지도자

    (오병이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을 들으면 좋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수님 인기가 더 많아진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라 하신다.

    예수님이 축사하셔서 떡 5개와 물고기를 나눠 먹는다.

    성찬의 메시지를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함

    예수님의 인기가 더 많아지는 중에 제자들을 빨리 보내신다.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고난 가운데로 보내신 것 같다.

    왜 제자들에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떤 생각이셨을까?

    우리가 부족한 인간이기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생각해보면

    막 6:46~47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5,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쫓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황급히 보내고

    그 무리를 다시 돌려보냈다.

    그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신다.

    막 1:34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을 귀신을 내어 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4:32

    저희가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나의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았으라 하시고

    공생애 기간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긴밀한 소통인 기도의 시간을 가지셨다.

    마가복음 1장의 말씀과 본문의 말씀에서 언제 기도하러 가셨는지 살펴보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피로에 지쳤을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한다.

    십자가를 지기 전에도 기도하신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을 때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

    혼자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세상의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고하고 문제에 대해 소통할 때 해결해 나갈 때 믿음이 커지고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무슨 생각으로 기도하셨을까?

     

    내적으로 가지셨던 고민

    1.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가야한다.
    2. 제자들을 세우고 훈련 시키는 일

    천국복음을 깨닫도록 영적으로 깨닫도록

     

    외부적인 어려움

    1. 전통적 유대인들의 적대심

    (전통적 유대인) 바라새인 서기관 대제사장

    막7: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헤롯 자기의 자리가 위태로워서 예수님을 적대한다.

    막3: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막12:13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 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들을 경계하라고 하신다.

    막8:15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외부적인 어려움

    민족주의자

    로마로부터 압제를 당하는 상황이 속이 상했고

    예수님께서 하려는 일들에 민족주의자들이 어려움을 준다.

    이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면 제자들이 어떻게 될까?

    사람이 얼마나 연약한가?

    자신이 주어진 환경에 따라서 선택하고 결정하는 게 사람이다.

    사람은 주변 환경에 엄청난 영향을 받는 존재이다.

    수천 명이 예수님을 외치면

    제자들은 엄청 뿌듯할 것이다.

    수천 명 앞에서 박수갈채를 받아본 적 있습니까?

    정치를 하는 사람이 낙선되더라도 정치판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마약을 하면서까지 무리하면서 음악을 하며 무대를 서려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밑에서 사람들이 이름을 외쳐주고 열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것을 못 끊는다.

    많은 사람 앞에 지지를 받는 예수님을 보며 하나님 나라의 일은 깨닫지 못한 채 그들도 예수님을 육신적인 정치적 지도자로 따라가려 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내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곧 예루살렘에 입성해서 지도자가 되겠구나! 기대했을 것이다.

    예수님을 찾는 이가 더 많아졌고

    막 6:55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단 말을 듣는 대로 병든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오니

    온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인다.

    막6:56

    아무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마을이나 도시나 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병 치료가 알려져서 옷 가에 손을대고 성함을 얻는다.

    막6:47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막 6:48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예수님이 기도하는 동안 제자들은 밤새 노를 젓는 고생을 한다.

    요 6:18~19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난의 자리로 보내셨을까?

    제자들이 사람의 환호에 도취되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에 고난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어 그 죄를 깨닫게 하는 고난을 주시는 반면

    한 성도를 완전하게 하기 위한 연단의 시험이 있다.

    막 6:52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생명의 떡을 전하는 사명이 있는 제자들이 그 영광을 누리려고만 했기에 얻은 고난이다.

    성경은 제자들의 무지함을 지속적으로 알려준다.

    막 7: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막 8:21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풍랑과 같은 고난을 주신다. 우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이러한 고난을 당할 때 믿음 신뢰가 있어야 한다.

    사 55:8~9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예수님은 이 상황에도 십자가의 길을 걸으셔야 했고, 제자들의 무지함을 사랑으로 포용하고 가르치셔야 했다.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도 달랐다.

    내 생각과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훨씬 더 크고 완전하다.

    하나님의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는 것

    현재 내가 당하는 고난의 무게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무게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무겁고 귀하다.

    인간은 지금 현재 살아가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신다.

    그러니 내 삶의 계획을 내가 세우지 말고 내 인생 계획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고난을 달게 받으시면서 살아가는 거제교회 성도님 되시기를 축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