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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교회의 일치된 모습(행4:32-37)

    [복음 메세지] 교회의 일치된 모습(행4:32-37)

    [말씀 제목] 교회의 일치된 모습 (행4:32-37)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 날짜] 2026. 7. 11

     

    행4:32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 4장 32절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서로 나누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누어 주었습니다.

     

    행4:31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이러한 모습은 단순히 함께 모여 생활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함께 기도했고, 그 결과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각자의 생각과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서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겔11:19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에스겔 11장 19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게 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게 됩니다.

     

    이사야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을 받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지내는 평화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본성이나 욕심이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사랑이 다스리는 곳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나타내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갈등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 하나 됨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

     

    시133:1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성령 충만한 기도를 하고 난 뒤 서로를 바라볼 때 더 사랑이 충만하고 하나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는 육적인 가족보다 더 하나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과 뜻과 생각이 일치해야 합니다.

     

    롬8:27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성령으로 기도할 때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빌4: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나되는 비결은 바로 성령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나부터가 하나되기 위해 힘을 써야 합니다.

     

    엡4:2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장 2~3절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권면합니다. 기도하는 것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도 겸손하고 온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에 갈등이나 어려움이 있을 때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고, 내 생각과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도, 가정도, 우리 자신의 마음도 평안을 얻고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으로 권능을 받아 복음을 전하자 많은 사람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는 성도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랑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되어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겼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지고 복음의 은혜를 깊이 경험할 때, 자신의 것을 주장하기보다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사랑으로 섬기게 됩니다.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고린도후서 8장 9절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시고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자신을 낮추고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고, 결국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높이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내 생각과 내 권리만 주장하기보다 때로는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의 모습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한 마음과 한 뜻을 이루고, 서로 사랑하며, 복음을 전하고,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와 가정과 우리 자신이 이러한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서로를 겸손히 섬길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CGFvk4SWONQ?si=ii9AsZfEWsPN5k32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복음메시지] 엘리야 때(사도시대)처럼 (왕하 2:1-14)

    [복음메시지] 엘리야 때(사도시대)처럼 (왕하 2:1-14)

     

    [말씀제목] 엘리야 때(사도시대)처럼 

    [본문말씀] : 왕하 2:1-14

    [설교자] 장흥진 목자님

    [설교일] 2026. 04. 18. 토. 오전

    [설교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zxvHmF0f4JU

     

     

     

    하나님을 떠난 아하시아 왕.

    세속적인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죽음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다시는 살아날 수 없는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잠깐의 세속을 누리고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간 그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그 반대로 엘리아의 승천은 고난과 핍박을 견뎠으나, 죽음을 맛보지 않고 회오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믿음으로 승리한 성도의 표상을 나타냅니다.

     

     

    엘리아 선지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을 입고 주의 일을 받들었던 사람.

    우리도 엘리야처럼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일하려고 하는 사모함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나는 연약하지만 능력을 더해주셔서 믿음의 삶과 하나님의 사명을 받드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저의 삶과 인생에 하나님께서 능력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마음으로 기도해봅시다.

     

    무장을 하지 않은 모습과 완전 무장을 한 모습은 하늘과 땅의 차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입으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열매도 많아집니다. 엘리야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었던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불과 물이 내렸고, 마차를 가로질러 왕에게 달려갈 수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었으나, 불가능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 때처럼(사도시대) 영적인 부흥의 시대를 맞이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왕하 2:4)

    우리가 하나님 앞에 능력을 얻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저가 열 두 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둘째 겨리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왕상 19:19-21)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겉옷을 던져준 것은, 자신의 직무를 대신하라는 직접적이고 상징적인 전달 방식이었습니다. 이에 엘리사는 주저 없이 부르심에 “즉시” 일어나서 엘리야를 쫓으며 수종을 들었습니다. 엘리사가 될 수 있었던 비결 중에 하나는 “즉시” 행동하는 것입니다.

     

    헌신의 의미는…

    나의 행복을 위해서 사용할 시간을 주님이 쓰실 수 있도록 나의 삶과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워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기도할 시간조차 내지 못한다면, 평생을 세상에 묶여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시간의 분주함은 우리에게 능력을 얻게 하는 기도 시간조차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이 분주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꼭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여러분은 바쁘십니까?”

    하나님을 만나러 오기 위한 시간을 마련해 봅시다. 인생의 결말을 생각하고 과감하게 분주함을 버려봅시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시간을 살아봅시다. 삶의 분주함으로 복스러운 주의 일을 놓치지 맙시다.

     

    3. 주께서 복 주신 좋은 것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나오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눅 14:18~20)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에 감사함으로 나올 수 있으신가요?

    밭을 사게 해주심에, 소 다섯 겨리를 사게 해주심에, 장가를 가게해 주심에… 주님을 섬기는 헌신의 삶에 감사하지 못하고 살아가지는 않았는지 자신을 한 번 돌아봅시다.

     

    우리는 어려울 때 어떻게 기도했을까요?

    “이 기도를 들어주신다면 제가 이러한 삶을 살겠습니다” 하는 서원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들어달라고 하기 보다,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4. 주의 능력을 힘입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힘이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는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엘리야의 갑절로 은혜를 구했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절대 해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를 낮추어서 능력과 은사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서 능력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결론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맡기신 바 사명을 이루시기 위해서 부족함을 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통해 능력을 구해봅시다!

     

     

     

  • [복음 메세지]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복음 메세지]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말씀 제목]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6. 2. 6

     

    할렐루야, 성도님들 평안하십니까? 새롭게 발령을 받은 부임지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새롭다’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고 설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약간의 두려움도 느끼게 됩니다. 저 또한 기대도 되고요, 한편으로는 ‘아, 제가 잘 감당해야 할 텐데’라는 어떤 그런 걱정 아닌 걱정도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이렇게 새로운 상황들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생각하지 못했던, 내 힘으로 뭔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어떤 상황이 생길지 알지 못한 채, 우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사명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려다 보니 때로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 거죠.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개인, 가정, 교회가 이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광야라고 하는 두렵고 무서운 이곳을 지나게 하신 다음에,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모세는 죽고 그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로 이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들어간다는 것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훨씬 더 신장도 크고 힘도 강했던 가나안 족속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약 38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여기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다가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는데 그 땅을 정탐해 보니 자기들보다 너무 강해 보이는 족속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이 보였습니다. 너무 겁을 먹은 것입니다. 사실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광야로 돌아가게 하셨고, 8년이 지난 다음에 이제 다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쉽지 않지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사명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롬15:4). 우리 신약 시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들을 통해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 바로 우리가 장차 가야 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이자 명령이며 사명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도 있고 또 동시에 사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지금까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침노해야 합니다. 침노라고 하는 것은 싸우는 겁니다. 싸워서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은 이와 같이 싸워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후의 말씀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과 전쟁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얻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말씀 보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며, 이제 마지막에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만 합니다. 이런 삶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 그곳의 족속들과 싸워서 그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했던 바로 그런 과정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혼자서만 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넓혀 가야 합니다.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 여리고부터 시작해서 점점 가나안 중부, 남부, 북부로 확대해 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말합니다. 전도를 통해 그들도 하나님을 믿게 되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얻고 확장해야 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즉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큰 부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너희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란 걸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미 얻은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으면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다면 순종하겠죠.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성경의 말씀이 다 그와 같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말씀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렇게 믿음의 본질은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싸운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해서 그 땅에 들어가지 않거나 그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 말씀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뒤의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인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고 그 믿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보다 훨씬 강한 아낙 족속이나 하더라도 하나님하고 상대가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나와 함께하셔서 나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도 사실 그런 의미입니다. 양이 목자와 함께 있다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이 필요한 것들을 다 제공하고 쉴 만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을 지난다고 하더라도 목자가 함께 만 있다면 양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십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의 지경, 즉 범위가 나옵니다. 이 범위는 사실 굉장히 넓은 지역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 가나안 지역, 실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은 그들이 얻었던 곳보다 훨씬 더 큽니다. 지도를 보면 거의 한 열 배 정도 차이가 날 만큼 굉장히 큰 범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약속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밭 밑에 어마어마한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고 큰 은혜인가를 알게 된다면 내 모든 소유를 다 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요. 실제로 성경에 보게 되면 이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동안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걸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는 바울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는 가치를 잘 모릅니다. 막 지폐도 가위로 자르기도 하죠. 그러나 크면 가치를 압니다. 신앙에서 성장하면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성장하지 않으면 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잘 모릅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나 혼자 누리기 너무나 아쉬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줍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누리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치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삭제?

     

    우리가 믿는 목적은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천국에 왜 가려고 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그냥 좋으니까”라고 답할 수 있겠죠.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 삶 속에서 많이 경험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내가 많이 경험해야 “이게 정말 가장 좋은 것이구나”를 알게 되고 더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려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능히 당할 자 없게 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떠나지 않을 것이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눈에 보이는 건 힘센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그런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겠죠. 하나님께서 왜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내가 준 명령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나 그런 생각과 마음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필요한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가시는 곳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죄의 유혹과 사탄의 방해뿐이기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면 믿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됩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무리를 걸어오셨고, 베드로도 용기를 내어 물에 발을 내렸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물 위를 걷게 되었죠.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빠져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며 “의심하는 자여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믿음으로 가면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기적이 뭘까요?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지만,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적 아닌가요? 주변에는 평안함이 없어서 늘 불안해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아무 걱정이 없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7절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함께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말씀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건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중심의 신앙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씀이 중심이 안 되면 그 신앙은 금방 무너집니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8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동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말씀을 암송하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날마다 추구한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힘듭니다. 당연히 힘듭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힘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내 노력과 정성을 쏟는 만큼 나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담되고 행하기 어려운 말씀도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부담되시죠? 하지만 힘들수록 그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힘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순종하라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무리한 요구처럼 보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행하기 전에는 피곤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해서 행하게 되면 그 안에서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내가 명했으니 걱정하지 말라.”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됩니다.

     

    저 역시 오늘 처음으로 청주교회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주어진 시간 동안 이 곳에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많은 성도님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을까 고민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저도 그 말씀을 믿고 그렇게 하려 합니다. 성도님들도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믿으시고, 그 말씀을 따라 힘써 행하는 삶을 사신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열심히 순종하는 우리 청주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ryNq6qEbYX0?si=WsDDc7K9DzgSLdii

    설교자 : 장종규 목자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말씀 제목]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눅 12:3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11.22

    분당교회 즉 전 성남 기도소에 첫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인테리어 작업을 집사람과 직접했다. 전기톱을 빌려서 계단 하나 높이만한 단을 직접 제단했고 그 위에 붉은 색 융으로 덮었다. 벽면 페인트 칠을 하고 자모 예배실 창문 썬팅 작업도 했다. 그렇게 인테리어 작업을 마친 후 첫 안식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오전 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한분, 그리고 아기엄마 둘이었다. 게다가 정자동 할머니가 혼자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걸려서 하차한 후 교회까지 걸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갓난 아기를 막 출산한 두 자매도 아기를 안고 버스를 타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형제들은 모두 직장에 매여 있었다. 그러니 참석자가 없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금요일 오후까지 예배 준비를 모두 마쳤고 안식일 오전이 밝았다. 그렇게 우리 내외, 할머니, 두 자매와 두 아기 그렇게 7명으로 전세 얻은 회당에서 안식일 오전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예배 인원은 15명이 되었고 수세자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수세자는 박지영 문지혜 자매와 백소영 어린이 백하영 아기 최종민 아기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그 과거를 회상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숫자에 관심이 많고 연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 굴복하고 사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눈일까? 오늘은 제자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 중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라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의견을 수용하고 소수의 의견은 버린다. 이렇게 다수의 의견에 의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그것에 익숙한 우리는 그것에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 성향은 종교를 선택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교회, 다수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종교를 선택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는 과연 그것이 합당한 기준인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결의 맹점이 발견된다. 20세기까지 지구상의 절반의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현혹되어 공산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붕괴와 함께 그 사상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좇았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합당치 않은 것이라는 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또 중세 역사 속에 마녀사냥이 있었다. 유럽의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그리고 페스트에 의한 팬데믹 기간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재난과 재앙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이 마법사, 마녀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재난과 재앙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미신적 결론에 도달한 결과는 암울했다. 죄없는 양민을 마법사나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소위 이것이 마녀사냥이다. 이 마녀사냥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기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매한 다수의 편견이 만들어낸 범죄의 역사였다.

    그런가하면 과학의 영역에도 다수결의 폐단이 있었다.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시대에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으로 열심히 천체를 관찰하던 그는 태양과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를 천동설, 후자를 지동설이라고 한다. 지금은 지동설이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지동설을 주장하고 죽을 것이냐 철회하고 살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고 목숨은 구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물러나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현대에 와서는 천동설을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의 분별에도 우매한 다수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 속에 오히려 다수가 미신에 빠져 범죄하고 다수가 우매한 결론에 도달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별다르지 않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셨다. 그래서 부패한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고자 하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겨우 여덟 명이라’ 대단히 적은 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시대에 절대 다수의 인류는 멸망하고 소수만 구원을 받은 성경의 역사가 있다.

    또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유사한 사례를 발견한다. 당시 왕과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을 떠나 다른 이방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왕국이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신앙 회복을 위해 갈멜산에서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한다.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사백오십 인과 한 사람, 절대 다수와 절대소수가 대조되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울 선지자 사백오십에 아스다롯 숭배자 사백인을 합해 총 팔백 오십 인과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고 우상 숭배한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세상의 인류 역사 속에서도 또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우매한 다수가 얼마나 악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별과 선택이 진리인 경우를 본다. 그렇다고 소수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렇지 않다. 다수가 진리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듯이 소수도 진리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초점은 수적인 규모가 진리와 거짓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진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리란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듯이 진리를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구원과 멸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거짓과 진리의 기준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종종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고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전하는 세례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모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다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까?” 이 의문에는 두 개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안다. 반면 이미 익숙한 다수결의 원리가 기준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할 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본교회로 개종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런 고민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도 마음 속에 그러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그 난제로 고민했다. 그 고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받은 백성인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왜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는가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으로 택하셨는데 메시야를 거절했으니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 명확하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것인가? 모두 거짓말인가?” 바울의 결론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에서 답을 찾아냈다.

    (사 10:20-21)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란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자들, 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본토로 돌아온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남은 자’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마치 구약 시대에 그 남은 자가 있었듯이 사도시대에도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었다. 그 소수의 유대인들이 바로 사도시대의 ‘남은 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남은 자처럼, 바울 사도 시대의 남은 자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 복음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시대의 세례, 사도시대의 성령, 사도시대의 안식일이라는 진리를 붙들고 있는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은 바로 내가 이 시대에 남은 자라는 의식이 있는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참예수교회는 척박한 가나안 땅처럼 보인다. 소수이고 결핍되고 풍요롭지 않다. 그러나 살아계신 성령이 계시고, 진리의 말씀이 있고, 신도들의 순수한 삶의 모습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유요 재산이다. 그 소유와 재산의 가치를 깨닫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뿐 아니라 칼로 그 우상숭배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 선지자의 이런 비관과 절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눈에는 갈멜산의 승리 뒤에 세상에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합왕이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우상을 다 불태우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왕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을 놓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만 남았으니 죽여달라고 했다. 극도의 비관과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칠천인의 존재를 말씀하셨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이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할 때 이렇게 인용한다.

    (롬 11:3-5)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사도는 엘리야 시대에 겉으로는 엘리야 선지자 하나만 남은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이 칠천을 남기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수가 많건 적건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바울 사도가 구약 역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그렇다면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세계 인구의 0.25%인 천 이백 만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5%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백대 부호 중에 20%가 유대인이다.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좌지우지하는 민족이 바로 이 소수의 유대민족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육적인 이스라엘도 이러하나 영적인 이스라엘인 참예수교회도 육적인 눈으로 볼 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60여만 명은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비율이다. 절대 소수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인류사의 끝에 있는 남은 자들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진리는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없어지거나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은 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살아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님들은 말세의 남은 자로 선택되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처럼, 사도 시대에 남은 자처럼, 하나님은 말세의 남은 자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 믿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WxgvNVHMhKU?si=a0TpuieHnMB_2G-W

    글작성 : 김세한 목자

  • [복음메세지] 문안과 축복  (엡 6:21-24)

    [복음메세지] 문안과 축복 (엡 6:21-24)

     [제    목] 문안과 축복 (엡 6:21-24)

     [설교자] 허명도 목자   

     [설교일] 2025년 6월 7일 안식일 오전

     할렐루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에베소서 6장 21절-24절 말씀인 “문안과 축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겠습니다. 이 시간에는 에베소서 마지막 부분인 6장 21절부터 2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문안’과 ‘축복’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로 은혜 나누겠습니다.

      1. 문안: 사랑의 전령사 두기고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주 안에서 진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엡 6:21-22]

      바울사도 서신에는 보통 많은 사람들의 문안 인사가 나오는데, 에베소서 마지막에는 유독 ‘두기고’라는 한 사람만 언급이 됩니다. 두기고는 아시아 사람이며 바울사도가 마지막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 동행했습니다.골로새서, 에베소서, 디모데 후서를 전달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와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라 [행 20:4]

     1) 바울사도의 모든 사정을 다 아는 두기고

      – 두기고는 바울사도와 동행하면서 바울사도의 모든 사정을 알았기에 성도들에게 바울사도와 동행하면서 알게 된 사역의 내용과 상황을 전달 할 수 있었습니다. (골 4:7-8)

    2) 사랑을 받은 형제 두기고

      – 바울사도에게 사랑 받는 믿음직한 동역자였으며, 두기고의 진실된 인격은 교회 안팎으로 인정받았습니다.(엡 6:21, 골 4:7)

    3) 주 안에서 진실한 두기고

     – 두기고는 주 안에서 신실하고 변함없이 헌신하며 겸손한 일꾼으로 섬겼습니다. 두기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서 디모데를 부르기 위해 에베소로 보내졌으며, 디도에게도 보냈습니다. (딤후 4:12, 딛 3:12)

     4) 사랑의 위로자 두기고

     – 두기고는 감옥에 있는 바울사도를 대신하여 그의 사정을 교회에 알리고 성도들에게 마음의 위로와 격려를 할 수 있었습니다. (엡 6:22, 골 4:8)

      교회에는 두기고 같은 동역자가 꼭 필요합니다. 두기고 같이 모든 사정을 알고, 교회에서 사랑과 섬김으로 성도들을 위로하고, 주 안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바램과 축복: 에베소성도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3가지 축복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평안과 믿음을 겸한 사랑이 형제들에게 있을찌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찌어다 [엡 6:23-24]

    1) 평안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 평안은 그리스도인들 간의 사랑을 통해 실현됩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될 때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평안이기에 그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엡 4:2-3)

    2) 믿음을 겸한 사랑이 있기를 바랍니다.

    – 사랑은 살아있는 믿음을 전제로 하며,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이 중요합니다. (엡 1:15, 4:5)

    3) 주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자에게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하기 위해 ‘썩지 않음, 불멸’을 뜻하는 헬라어 ἀϕθαρσία  ‘아프달시아’를 언급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주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이 있을 때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있습니다. (요 21:15-16)

     바울 사도는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으로 하나 되어 평안을 누리고, 믿음과 사랑으로 굳건히 서서,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함으로써 주의 풍성한 은혜가 넘치기를 간절히 바라고 축복했습니다. 우리 믿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하고 천국과 영생의 소망이 마음속에 가득 차게 되어 믿음의 확신이 생길 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의 복음 전파의 일을 마치기 위해선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때 진정으로 사랑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주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가운데 주의 풍성한 은혜가 넘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될 수 있기를 주 예수 이름으로 바랍니다

    ‘문안과 축복 유튜브로 보기’

  • [복음 메세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복음 메세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말씀 제목]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마5:13-16)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년 2월 1일

    2020년은 인류사에서 잊지 못할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확진자와 사망자를 낳았다. 그로 인해 팬데믹이라는 생소한 용어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상황인지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비록 해제된 지 2년이 지났지만 바이러스로 인한 팬데믹 사건은 오늘 날 세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서 큰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세계의 학자들은 21세기를 코로나 이전 시대와 코로나 이후 시대로 양분한다. 이 사건이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 결과의 원인이 매우 놀랍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매우 단순한 구조의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팬데믹의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이 있다. 첫째는 미래를 예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또 순식간에 멸망에 이를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우리는 경성해야 한다. 둘째 유익은 우리 교회의 가치와 영향력에 대한 낙관이다. 작은 바이러스가 이렇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군소 교단인 우리 교회도 상상할 수 없었던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래가 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재 다수냐 소수냐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 미래에는 소수가 다수도 될 수 있고 다수가 소수로 전락할 수 있다. 설사 소수의 규모에 머문다 할지라도 그 영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규모 때문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 또 이런 말씀도 있기 때문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까지 산상보훈 가운데 팔복 설교를 살펴보았다. ‘복이 있나니’라는 주님의 선언의 내용이 여덟 개의 주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했다. 이 여덟 개의 주제는 천국 백성의 속성에 대해 말한다. “천국 백성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성품을 가진 자에게 이런 복이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다. 거기에 이어서 오늘 말씀이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의 천국 백성은 결국 “세상에 이런 영향력을 미칩니다.” “천국 백성은 이런 역할을 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설명하실 때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시고 있다. 바로 소금과 빛이다.

    먼저 발견되는 점은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표현되지 않고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세상의’라는 수식이 붙는 것은 성도란 세상을 등지고 산 속에 들어가 은둔하면서 살면 안된다는 뜻이다. 오히려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타인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는 환경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 5:10)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그러면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고 그런 존재가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뜻인가? 그 교훈을 얻기 위해 우리는 소금과 빛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소금과 빛의 공통점을 주목하면 그 의미와 이루어질 일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다. 둘의 공통점은 이렇다.

    첫째, 소금과 빛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한다.

    (엡 5:8-9)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소금은 살균력이 있어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음식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은 바로 소금에 절여 놓는 것이다. 안동에 가면 꼭 먹어봐야 하는 음식 중에 간고등어가 있다. 바닷가로부터 멀리 떨어진 경북 안동 지방 사람들이 생선을 먹으려면 운송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부패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서 상하지 않게 하려고 고등어를 소금으로 절였던 것이다. 그래서 안동에서 간고등어가 명물이 되었다.

    애굽에서는 죽은 시체를 미이라로 만들 때 소금물에 넣어두었었다.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그런가 하면 집안 살림 용품 중에 찌든 때를 제거하고 소독 청소하는 ‘락스’라는 제품이 있다. 이 ‘락스’는 화학상의 원료가 바로 소금이다. 이처럼 소금에는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빛도 마찬가지로 부패를 방지하는 기능이 있다. 지하실 같은 어두운 장소에는 세균이 득실거린다. 그러나 그곳에 햇볕이 내리쬐거나 그곳의 물건들을 햇볕에 내놓으면 태양광 자외선에 의해서 깨끗이 살균된다.

    병원에서는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일에 사용하는 장비가 있다. 방사선을 사용하는 장비이다. 이런 장비는 빛을 고 에너지로 농축시킨다. 그래서 암환자의 환부에 쪼이면 암세포가 사멸하게 된다. 이처럼 빛에는 병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그런가하면 어두운 밤거리를 비추는 방범등이 있다. 방범등은 청색이 많은데 이는 흰색등보다 더 멀리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색등을 방범용으로 활용하면 범죄율이 감소한다는 설이 있다.

    이처럼 빛과 소금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부패와 오염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성도를 일컬어 “너희가 바로 그런 존재다”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소금이 그런 속성을 가지도록 만드신 것처럼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만드셨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빛 안에 그런 속성을 넣어두신 것처럼 천국 백성 안에 그런 성향을 가지게 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을 적극적으로 행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는 자기 정체성을 지키라는 뜻이다. 그 정체성에 충실하면 세상 속에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골 4: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세상의 인간관계 속에서 들려오는 말에는 냄새나 향기가 있다. 비방의 말, 원망의 말, 남을 깍아내리는 말, 자기 신분에 걸맞지 않은 말은 마치 부패하는 음식 냄새와 같다. 역겨워서 그 자리를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반면 칭찬의 말, 감사의 말, 은혜를 끼치는 말, 자기 신분에 합당한 말은 방향제를 뿌린 것처럼 향기롭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 곁에는 오래도록 함께 하고 싶다.

    이처럼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신분에 맞는 언어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 불신자들은 자신들의 무리 속에 경건한 성도가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긴장한다. 그래서 함부로 상스런 말도 못하고 함부로 행동하지 못한다. 부디 썩어져 가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은혜로운 언어를 통해 부패를 막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란다.

    둘째, 소량이지만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다에서 염분의 양은 3.4%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렇게 작은 비율의 염분 때문에 바다물은 썩지 않는다. 염분은 바다를 썩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인체에도 필수적인 광물이다. 염분은 사람의 혈관 벽에 붙어있는 이물질을 제거하고 혈관이 딱딱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또 장내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키고 장의 움직임을 원활하게 해서 장내 음식물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 이처럼 아주 작은 양이지만 소금이 미치는 영향력은 매우 크다.

    빛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한 밤중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들은 항구를 찾아오기 위해서 수많은 조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몇 십 개 몇 백 개의 등대가 필요하지 않다. 불이 켜진 한 개의 등대만 있어도 배들이 악천후에도 안전하게 항구로 되돌아오기에 충분하다.

    가로등도 없는 시골길에서 행인이 보행하려면 어느 정도의 빛을 필요할까? 작은 손전등 하나만 있어도 밤길을 가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으로 안전하게 보행할 수 있다.

    작은 빛이라도 있다면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있다. 이처럼 소금이 아무리 그 분량이 적을지라도, 또 빛이 광도가 아무리 미미할지라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는 그 영향력은 충분하다. 주님은 바로 천국 백성인 성도를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다. 부디 그런 사실을 이해하고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자.

    (빌 2: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셋째, 자기 희생을 통해 유익을 준다.

    팔레스틴의 소금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소금과는 많이 다르다. 당시 그 사람들은 바다에서 소금을 취한 것이 아니라 육지에서 소금을 취했다. 이것을 암염이라고 하는데 한마디로 돌과 소금이 섞여 있는 것이다. 사해 주변에는 암염이 많이 있다. 이 암염으로부터 소금을 체취하는 과정은 이렇다. 암염을 물에 넣으면 염분 성분은 녹고 돌 성분만 남는다. 그렇게 물로 녹여낸 염분을 다시 증발시키면 소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물로 염분을 녹이는 일을 반복하면 나중에는 염분이 다 빠지고 돌 성분만 남게 된다. 이렇게 염분이 다 빠졌으니 이제 소금을 얻을 수 없고 그런 암염은 길바닥에 내다버렸던 것이다. 그러면 그 맛잃은 암염이 오가는 사람들의 발에 밟혔던 것이다. 본문 말씀에 맛 잃은 소금이 발에 밟힌다는 뜻은 이런 배경아래 나온 표현이다. 이처럼 암염이 맛을 내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것은 바로 물에 자기를 녹여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바로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이다.

    빛도 유사한 특징이 있다. 예수님 공생애 시대에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단순했다. 오늘날처럼 채광이 잘되는 구조가 아니다. 출입문이 하나요 창문은 작았다. 그래서 대낮에도 실내는 매우 어두웠다. 그렇다보니 사람들은 주간에도 항상 등잔불을 켜고 생활해야만 했다. 따라서 전기도 없던 그 시절에 등잔은 모든 가정이 구비하는 필수품이었다. 그 등잔에 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필요했는데 그 기름의 원료는 바로 감람유, 올리브유였다. 올리브유는 정제해서 가장 먼저 추출되는 것을 엑스트라 버진이라고 해서 식료품으로 사용한다. 보통 네 차례정도 추출하는데 가장 나중에 추출되는 질이 낮은 올리브 오일을 등불용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이처럼 실내에 빛을 비추려면 등불을 밝혀야 했고 등불을 밝히려면 기름이 태워져야 했다. 즉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과정이 필요했다.

    이렇듯 소금을 보아도 등잔불을 보아도 녹아지고 태워져야 한다. 녹아지고 태워지는 희생의 과정이 없으면 존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다. 이처럼 성도가 천국 백성이라는 존재로서 의미가 있으려면, 자기 사명을 완수하려면 반드시 자기희생의 과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그런데 그 희생은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속에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밝혀야 한다. 소위 커밍 아웃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다운 말과 행동을 통해서 세상과 소통하고 대화하며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과 소금의 사명을 다하는 참 성도의 모습이다. 만약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마치 염분이 다 빠진 암염과 같다. 그것은 마치 등잔불에 소쿠리를 덮어 놓은 것과 같다. 부디 자기 정체와 자기 신앙을 세상을 향해 적극적으로 밝히고 드러내는 성도가 되자.

    예)참예수교회의 초기의 발전에 자기희생의 목자님들이 있었다. 세무서 공무원의 안정적인 신분도 마다하고 나아가 순교도 불사하고 목회의 길을 나선 박필선 목자님 같은 분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분 한 분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어려운 시대에 사회로 나가지 않고 한 달에 쌀 한 포대 정도의 노임만 받고 희생한 원로 목자님들이 있었다. 이렇게 자기를 내어주는 목자님들이 있었기 때문에 참예수교회가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 희생의 전통은 끊어지지 않고 대물림 되었다. 어떤 목자님은 사회 속의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위해서 목회의 길을 선택했다. 자기를 내어주는 희생의 정신은 앞으로도 그 전통이 되어 이어질 것이다.

    그런 현실을 볼 때 저는 비록 우리 교회가 소수지만 미래가 매우 밝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소금과 빛의 역할이 살아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살아있으면 우리 교회는 미래에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결과를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도님들은 어떻게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할 수 있을까? 모두 목회자가 되어야할까? 박필선 목자님처럼 다른 원로 목자님들처럼 그렇게 목회자의 길을 가라는 것인가? 순교라도 하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성도님들은 최전선에서 세상과 접촉하며 영적인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소속한 사회와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 소금과 빛의 사명을 완수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기독교인이라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자기 정체에 일치하는 삶을 살자. 세상으로부터 저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라는 칭찬을 듣자. 여기까지 가면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세상의 사람들은 소유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 그러나 우리는 소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지 않았다. 세상을 위해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 주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그 모범을 보여주셨다. 부디 주님이 남기신 모범대로 빛과 소금의 본분을 다하는 성도가 되자. 나를 통해 세상이 변화될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 사명을 감당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천국의 기업을 상속하시는 저와 성도가 다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복음 메시지] 구원의 핵심진리, 안식일

    제목: 구원의 핵심 진리, 안식일

    일시: 2024년 10월 25일 안식일 저녁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1. 안식일이란?

    성경에 등장하는 ‘안식일’은 무슨 날일까요? “안식”은 ‘자신이 하던 일을 끝내고 쉰다’라는 의미입니다. 안식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입니다.

    (창2:2)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창세기에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내용뿐 아니라 창조하신 일을 다 마치시고 안식하라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안식일의 기원이 사람의 명령이 아닌 창세 때의 하나님의 명령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음을 기록하는데, 성경이 기록하는 안식일은 일곱째 날, 곧 토요일입니다. 정확히는 저녁부터 하루를 세는 성경의 기준으로 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에 해당합니다.

     

    2.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

    성경은 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 어떤 의미가 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걸까요?

     

    첫째,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출20:8~11)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칠 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장의 내용은 십계명에 관한 내용입니다. 네 번째 계명에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1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 일에 쉬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는 가운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둘째,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신5:12~15)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신명기에서는 앞서 살펴본 출애굽기와 비슷한 내용이지만, 자세히 보면 조금 다른 내용이 있습니다. 바로 출애굽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명기는 과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민이 되도록 하신 구원을 기억하며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에 대한 동일한 두 말씀에서 각자 창조와 구원을 말하시는 것을 통해, 구원은 곧 창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애굽(죄)의 종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인데, 이러한 신분의 변화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됨을 의미합니다. (사43:2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그 백성을 지키신다고 말씀하십니다(시121:4). 전능하신 하나님이 지키시니 하나님 백성보다 안전한 상태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 삼아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고 찬양하길 바라십니다.

    셋째, 안식일을 지킴으로 영육 간에 복을 받습니다.

    (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복을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안식일을 복되게 하셨다는 것으로, 안식일을 지키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복은 영육 간에 주시는 복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안식일을 지킬 때 만나와 메추리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특별히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모여서 예배할 때 성도에게 필요한 말씀을 주셔서 영의 양식을 채우십니다. 실제로 많은 성도님이 한 주 동안 힘들었다가 안식일에 말씀을 듣고 힘을 얻거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넷째, 안식일을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출31:13)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나의’ 안식일이라고 말씀하시며 안식일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표징, 곧 증거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 곧 하나님의 날을 지키는 것이므로, 이를 하나님 백성인 증거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출31:14).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므로 하나님 안에 거하려면 거룩해야 하는데,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거룩함을 잃어서 결국에는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하게 됩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죽음을 맞게 됩니다. 즉 안식일은 거룩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날로 이를 지키면 구원에 이르게 되지만,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면 점점 구원에서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안식일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안식이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리게 되는 진정한 안식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 전 세상에 살 동안에 안식일을 통해 그 안식을 준비하도록 하셨습니다.

    (히4: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안식일에는 성도가 같이 모여 예배드리고 교제하면서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힘들었던 부분이 하나님 안에서 해결됨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안식을 통해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고, 더욱 하나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안식일을 주셨습니다.

     

    3. 안식일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은 아직도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까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일요일, 즉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율법의 일부인 안식일을 지킬 필요도 없고, 도리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이 의미 있으므로 주일(일요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장이 사실일까요?

    (갈3:15-17)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라디아서 말씀은 율법을 주시기 430년 전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을 나중에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안식일에 동일하게 적용해 보면, 안식일은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중에 주신 율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물론 율법 속에는 안식일에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한 방법에 대한 규례가 있고, 이러한 것은 율법에 속한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은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식일 그 자체는 율법의 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에 직접 주신 다른 말씀들도 오늘날까지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일도 동일하게 오늘까지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날이 일요일이라는 주장도 명확한 근거가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이 일요일 새벽에 갔더니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설사 예수님께서 일요일에 부활했다고 하더라도 성경 전반에서 아주 중요한 안식일이 다른 날로 변경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성경에 언급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일요일에 부활했으므로 안식일을 대신해 일요일을 지킨다는 것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막7:6-8)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마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되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겉으로는 섬기는 것처럼 보여도,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는 일은 있을 수 없는데, 오늘날 성탄절, 부활절 등 성경에 없는 절기를 지키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은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사람의 계명을 우선하는 교만함에 진노하십니다.

     

    마무리하며

    (사58:13,14)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을 내 중심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면 위와 같은 복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실제로 이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면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받습니다. 안식일을 힘써 지킴으로 하나님 주신 복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오다은 자매

  •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복음 메세지] 심령이 가능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5:1-12)

    [말씀 제목]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5:1-1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11월 2일

    19세기 말 지식인들은 앞으로 다가올 20세기를 일컬어 인류의 황금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 장밋빛 미래 예측의 근거는 인간의 과학 기술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작 20세기에 이르렀을 때 그 예측은 크게 빗나갔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 대전을 통해 미래가 밝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문제들도 있었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산업 혁명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지만 빈부의 격차라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고 또 오늘날에 와서 환경오염, 기후 변화 등의 문제가 인간의 목을 조르고 있다. 인류는 이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물질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과 불행이라는 영혼의 문제를 물질에서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전제와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곳에 있고자 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들이다.

    인류의 역사도 그렇지만 오늘날 개인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물질과 육체의 욕망에 집중하며 살면 인생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과거 인류의 역사 속에서 그 전제가 틀렸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잘못된 전제에 빠져 자기 인생을 허비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그런 어리석은 인간의 전형을 발견한다. 바로 소돔과 고모라 땅을 선택했던 롯이다. 롯은 눈에 끌리는 대로 풍요로워 보이는 소돔 땅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 땅은 유황불에 멸망하고 그 멸망과 함께 롯도 모든 것을 잃는다. 욕망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모두 잃는 모순된 결과를 맞이한다. 이것이 똑똑한 것 같지만 어리석은 인간의 실상이다. 이러한 인간의 어리석음은 또 어디에서 발견되는가? 멀리 있는 유익을 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유익에 집착한다. 자신에게 해가되는 것도 모르고 목숨을 바쳐 쟁취하려고 달려든다. 가장 소중한 것을 옆에 두고 가장 먼 곳에서 그것을 헤매기도 한다. 또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찾았는데 변덕이 생겨서 그것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기도 한다. 인간은 이렇게 어리석은 면이 많고 헤매는 존재임을 성경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사 59: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어떻게 이런 오류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의 백성으로서 평강을 누리고, 가치를 누리고, 하나님께 드릴 아름다운 보석으로 내 인생을 장식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러기 위해서 나는 먼저 어떤 존재가 되어야할까? 오늘은 산상보훈의 팔복 설교의 첫 구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는 이 말씀의 뜻을 되새기고 함께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오늘 구절에 대해서 문법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문장 순서가 원문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원문을 직역하면 “복이 있으리라,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왜냐하면 천국이 저희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순서로 기록되었다. 복이 있다는 기원의 말이 문장의 맨 앞에 등장하고 복이 주어진 이유를 맨 나중에 기록하고 있다. 주목되는 단어가 있는데 첫째는 심령이란 명사이고 둘째는 가난하다라는 동사이다. 심령이란 명사는 ‘프뉴마’(pneu’ma) 즉 ‘영’(靈)이란 뜻이다. 가난하다란 동사는 ‘프토코스’(ptwcov”)로 ‘가난하다, 불쌍하다, 연약하다, 빈궁하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문자대로 옮기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곧 ‘영이 빈궁하다.’ ‘영이 결핍되어 있다.’ ‘영이 불쌍하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영이란 단어를 안다. 그리고 가난하다라는 단어도 안다. 그런데 ‘영이 가난하다’라는 말은 도대체 어떤 개념인가? 또 영이 가난한 자는 왜 천국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는가? 여기서 말하는 영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가?

    첫째, 세상의 것으로 채울 수 없는 마음이다.

    (사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사실 심령이 가난하다는 표현은 예수님이 처음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유사한 표현을 사용했다. 이사야 선지자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이 가난하다는 뜻은 곧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망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말씀을 존중하며, 그분을 경외하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영이 가난한 상태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않아야 할 점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물질은 없어도 마음만은 부자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의 풍요가 중요하니 물질적 가난은 중요하지 않다”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심령의 가난하다는 개념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교제하고자 하고, 그분의 손길을 소망하기에 가지게 되는 영혼의 결핍 상태가 바로 심령이 가난한 상태라는 것이다.

    예수님 공생애 초기에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자가 있었다. 바로 니고데모이다. 그는 육신적으로 부족할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바리새인이요 예수님 장례에 몰약을 백근 쯤 봉헌한 인물이다. 소위 명예와 신분과 재력을 모두 갖춘 자이다. 그런데 그가 뭐가 아쉬워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는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길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거듭 나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핵심을 말씀하셨다. 세상 기준으로 보면 다 가졌는데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영혼의 갈급함을 느끼는 자,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또 마태가 있다. 그의 직업은 세리였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둬서 로마 정부에 일정액만 잘 상납하면 나머지는 자신이 몫이 되었다. 그러니 욕심대로 부를 축적하고 물질의 풍요를 누릴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세관에서 일하는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마태는 놀랍게도 이 한 마디에 주저 없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을 쫓는다. 가족과 의논하지도 않고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다. 그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가? 분명한 사실은 그는 그 풍요의 자리에 미련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응답이 즉각적인 것을 보면 그는 세리의 자리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마태 같은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그 마음을 세상 것으로 채우지 못하고 하나님으로 채우려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하나님에 대한 욕망보다 세상 물질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치 쇼핑 중독에 걸린 사람이 물건을 사면 살수록 더 사고 싶고 사서 집에다 쌓아놓으면서 다시 사는 것처럼 물질에 집중하면서 살고 있지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고 이웃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을 사는가? 아니면 세상의 것을 끊임없이 욕망하면서 헛된 노력에 매달리고 있는가? 부디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혀 물을 보관하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가 되지 말고 하나님께 갈급하고 하나님 주신 것으로 채우고 만족할 수 있는 영혼이 되시길 바란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둘째,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 마음이다.

    (왕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심령이 가난한 자의 두 번째 특징은 세상의 것으로 자랑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다. 자기 물질, 신분, 권세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을 얻으면 자랑한다. 그러나 심령이 가난한 자는 그런 것으로 자랑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겸손하다.

    솔로몬 왕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둘도 없는 화려한 성전을 지은 인물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성전을 완성했을 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다. 하나님은 세상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신의 손으로 지은 건물은 그 분을 모실만한 거처가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낙성식 기도에서 그는 이 생각을 고백한다. 초기의 솔로몬은 이렇게 심령이 가난한 자였다.

    솔로몬은 육적 성전을 지었지만 신약 시대에 이르러 영적인 성전을 지은 인물이 있다. 바울이다. 그는 바리새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사였다. 오늘날 표현을 빌리면 개인적 스펙이 화려한 사람이다. 그러나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을 오히려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가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머리 속의 지식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에 핍박과 위험을 감내하며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에 헌신했다. 그렇게 헌신의 삶을 살고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렀을 때 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오히려 나의 나 된 것은 주의 은혜로 되었다고 고백했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심령이 가난한 자의 특징은 자기를 낮춘다. 우리는 때로 세상 것을 포기했다고 말하면서 교회 안에서 세상 것을 추구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마치 베드로와 제자들이 배와 그물은 버리고 예수를 쫓았는데 예수님이 유대인의 임금이 되면 좌편과 우편에 앉아서 벼슬 좀 하사 받으려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의 것을 세상 것 자랑하듯 자랑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자기의 하찮음을 돌아볼 줄 알고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잘 알기 때문이다. 부디 하나님이 너무 크심을 알고 자기의 작음을 고백하는 자가 되자.

    (고전 3:21)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셋째, 오로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마음이다.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물질이든, 환경이든, 사람이든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은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 그런데 시편의 기자는 물질도, 환경도,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찾기에 갈급한다고 했다.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복을 갈급해 한다’고 기록하지 않고 ‘주님을 찾기에 갈급함’을 노래했다. 이 마음을 어떻게 비유할 수 있을까?

    엄마가 아이에게 말한다. “엄마가 장보고 돌아오기 전까지 집에서 잘 놀고 있거라! 돌아와서 맛있는 과자를 사줄테니 잘 놀고 있거라.” 그런데 아이는 싫다고 울면서 떼를 쓴다. 과자도 싫고 사탕도 싫고 장난감도 싫으니 엄마랑 떨어지지 않겠단다. 마치 어머니에게 함께 있기를 애원하는 이 어린 아기처럼 주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은 그런 마음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과자와 사탕과 장남감을 좋아하지만 과자도 사탕도 장난감도 엄마를 대신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이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2년 동안 청계천 판자촌에서 산 경험이 있다. 그 때의 추억은 한마디로 가난이다. 판자촌은 합판을 덧대서 망치질한 방에 벽면은 도배지 대신 신문지로 발랐고 그렇게 만들어진 방과 방들이 끝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요즘은 한 집에 화장실이 둘도 있지만 그 때는 화장실이 한 집에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은 온 마을 사람이 함께 쓰는 공중 화장실이었다. 마을 앞에는 청계천이 흐르고 어머님은 직장에 다니시면서 매일 동생과 저에게 10원짜리 동전을 쥐어 주셨다. 형제는 행여나 주머니에 넣으면 빠져서 잃어버릴까봐 그냥 손에 꼭 쥐고 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그 돈으로 동네 만화방에 갔다. 왜냐하면 티브이에서 방영하는 재미있는 만화 영화를 보기 위해서다. 만화가 끝날 때 쯤 퇴근하신 어머님은 저희 형제를 데리러 만화방으로 오셨다. 그리고 어머니가 사주시는 붕어빵을 맛있게 먹으며 판자촌 집으로 귀가했다. 이상한 것은 그 가난했던 시절이 지금은 행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인가? 사랑하는 어머님과 함께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다.

    (합 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성도님들 오늘 나는 어떤 영혼의 사람인가? 나의 영혼은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그분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 오로지 하나님을 갈망하며 겸허하게 그분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자. 이것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다. 부디 이런 마음을 품고 하나님과 교제하시고 동행하시고 하늘의 속한 신령한 것으로 배부르고 만족해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예수 이름으로 기원한다.

     

  •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복음 메시지]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제목: 아름다운 소식 (사40:9-11)

    일시: 2024년 8월 31일 안식일 오후 ‘열린 예배’

    설교자: 장종규 목자

     

    아름다운 소식이 있을 때 우리는 전하고 싶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아름다운 소식은 바로 ‘하나님의 통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것이 왜 아름다운 소식일까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강한 자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 바벨론의 압제 아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바벨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시니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사40:15)

    이스라엘이 바벨론 압제 속에서 사는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권세 속에서 살아갑니다. 사단은 내 생각, 내 욕심대로 살게 함으로 평안도 없고 두려움과 불안의 삶을 살게 합니다. 영적인 소경이기 때문에 다만 알지 못할 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행26:17-18)

    둘째로 하나님의 통치가 아름다운 소식인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목자같이 다스리기 때문입니다.

    “그는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사40:11)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 속에 살아갑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요10:14-15)

    주님은 우리를 가장 잘 아실 뿐 아니라 당신의 목숨까지도 버려 사랑하셨습니다. 그 선하신 목자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니 우리는 가장 선하고 좋은 곳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그 은혜를 경험하고 더 나아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골1:13-14)

    흑암의 권세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세례를 통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하나님을 왕으로 모셔야 합니다. 내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 곧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그 순종을 돕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겔36:27)라는 말씀처럼 성령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살고 그 기쁨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열왕기하 7장에는 문둥병자의 아름다운 소식이 나옵니다. 그들의 말을 듣고 성 밖으로 나와야 아름다운 소식을 접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리만의 견고한 성을 부수고 나와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과 맞지 않는 자기만의 생각, 뜻, 사상, 감정, 경험 등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힘써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와 그 다스리심을 받는 복된 자 되길 원합니다.

    유튜브 설교방송 링크

    글| 백현 자매

  • [복음 메세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복음 메세지]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말씀 제목]  무엇을 뿌리고 계십니까? (삼하14:1-23)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4년 7월 20일

    어떤 퇴임 목자님의 간증이다. 스무 살이 되어 직장을 구하고 생각했다. ‘이제 월급을 받고 집안도 안정될 테니 담배도 좀 피우고 술도 좀 배우고 노래도 좀 배워야겠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에 친근하신 할머니가 “아무개야! 이제는 교회 나가야지?” 권유하시더란다. 그래서 “예”라고 대답하고 그분을 좇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 담배도 술도 유행가도 모두 끊고 교회 생활에 빠져든 것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어찌나 즐겁던지 나중에는 신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총회로부터 권유 받아 목회자가 되었다. 그리고 평생 하나님의 일꾼으로 섬기다가 정년 퇴임하셨다. 과거를 돌아볼 때 동네 할머니의 한 마디. “아무개야! 이제는 교회 나가야지?” 그 한 마디의 말이 인생의 전환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간증을 듣노라면 우리의 말과 행동의 영향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당시에는 대수롭지 않은 말과 행동이었겠지만 그것이 세월이 흘러 먼 미래에 열매를 맺는다. 그것은 선한 길에도 악한 길에도 다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인생은 어쩌면 정원을 가꾸는 일과도 같다. 하나님이 울타리 쳐주신 정원에 씨를 뿌리고 물주고 가꾸는 것이 우리의 몫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씨를 뿌리고 어떤 관리의 노력을 하느냐에 따라 꽃밭이 되기도 하고 쑥밭이 되기도 하고 텃밭이 되기도 한다. 성도는 내가 현재 내 말과 행동의 씨앗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그런 경성함에 대해서 교훈한다.

    (잠 14:15) 『(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우리는 인생의 정원에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그리고 장래에 그것이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는가? 오늘은 다윗이 드고아 여인의 비유를 통해 압살롬의 귀환이 허락된 사건에서 그 관련된 인물들이 보여준 모습을 통해 함께 생각하고 교훈을 받는 시간을 가지고자 한다.

    압살롬은 맏형 암논을 살해하고 그술 땅으로 도망했다. 그런데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듯이 비록 범죄자였지만 다윗 왕은 압살롬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있었다. 자식이 악하고 못나도 미워할 수만은 없는 것이 부모 마음이지 않는가? 또 다윗은 아마도 압살롬 모습 속에서 과거 범죄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를 향한 아버지로서의 마음이 더 애틋했을 것이다. 그런데 군대 장관 요압이 그런 다윗의 마음을 눈치챘다. 그래서 압살롬을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할 계략을 꾸미게 된다. 요압은 드고아 출신의 한 여인의 입안에 비유를 넣어주고 다윗 왕 앞에 나가 말하게 한다. 드고아 여인은 마치 자신의 가정 문제를 왕께 호소하는 것처럼 가장해서 이런 비유를 베푼다. “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서로 싸우다가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죽였습니다. 율법대로라면 살인한 아들은 사형시켜야 하는데 그러면 저희 집안에 대가 끊기니 한 아들만이라도 살 수 있게 임금님이 특별 조치를 해주십시오”라는 간청이었다. 다윗 왕이 그 청을 들어주겠노라고 대답하니까 비로소 드고아 여인은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 “왕께서 사실은 그 같은 상황에 처해 있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다윗왕은 단번에 이 여인이 요압 장군의 사주로 나온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다윗 왕은 압살롬 왕자를 귀환시키라고 수락하게 된다. 요압은 도대체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 그가 한 일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또 다윗왕은 여인의 비유 한 마디에 아무런 훈육의 과정 없이 압살롬을 귀환시킨 것은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압살롬은 과거 자신의 과오에 대해 아무런 가책이나 반성 없이 그냥 지나친 것은 그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성경에는 많은 사건과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명확하게 이것이다 저것이다 밝히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독자가 성경 안에서 판단하도록 맡겨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 하나의 사건을 추적하다 보면 말씀 안에서 자연스러운 답을 얻게 되고 ‘아 그 때 뿌려진 것이 좋은 씨였구나! 악한 씨였구나!’ 를 판단하게 된다. 과연 요압과 다윗과 압살롬이 자기 인생에서 뿌린 씨앗은 어떤 씨앗이었고 그로 인해 미래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는 무엇인가? 세 인물을 통해 발견하는 교훈은 이렇다.

    첫째, 요압은 ‘야망’의 씨앗을 뿌려 ‘상실’의 열매를 맺었다.

    (삼하 14:1-2) 『[1]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줄 알고 [2]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요압 장군은 드고아라는 곳에 있는 한 여인을 통해 압살롬의 귀환을 도모한다. 요압은 왜 압살롬 왕자가 귀환하는 일을 추진하고자 했는가? 왕을 향한 충성심인가?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었는가? 요압과 관련된 기록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요압이 어떤 사람인지 가늠할 수 있다.

    요압은 전쟁에서 아우 아사헬이 전사한 것을 이유로 사울의 군장 아브넬을 죽였다(삼하 3:28-29). 다윗 왕의 입장과 명령보다 개인의 사적인 감정이 앞섰다. 요압은 행동은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로 인해 백성들은 혹시 다윗 왕이 사주해서 죽인 것 아닌가 하는 오해의 상황이 발생했다.

    또 요압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모반을 피해 도망갔다가 복직되었을 때 다윗은 압살롬을 생포하고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어명에도 불구하고 요압은 주저 없이 압살롬을 죽였다.

    (삼하 18:14)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만약 요압이 다윗 왕을 생각하는 순수한 뜻만 있었다면 어명을 어기고 왜 압살롬을 죽이겠는가? 요압은 압살롬을 아끼는 마음도 없었고 왕명을 준수할 충성심에도 결함이 있었다.

    또 요압은 다윗의 사후 솔로몬을 세우고자 하는 다윗 왕의 뜻과 다르게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다. 이런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요압은 장차 왕이 바뀌더라도 군장이라는 자기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에 있었기 압살롬의 귀환을 추진한 것도 그 이유임을 추정하게 한다. 그 의도는 드고아 여인의 비유 안에서도 발견된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에서 죽은 아들은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산 아들이 죽지 않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요점이다. 여기서 죽은 아들은 암논을 상징하고 살아야 할 아들은 압살롬을 상징한다. 요압이 이 비유를 통해 다윗 왕에게 전달하는 뜻은 하나님의 산업이 무너지지 않으려면, 즉 다윗의 왕통을 이어가려면 압살롬을 귀환시켜야 하지 않느냐는 뜻이다. 즉 요압은 압살롬을 왕통 계승자로 여겼던 것이다. 이처럼 요압은 장래 왕 후보자의 은인이 되어 자기 입지를 굳게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심에 의해 행동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삼하 17:25) 『압살롬이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으니라 아마사는 이스라엘 사람 이드라라 하는 자의 아들이라 이드라가 나하스의 딸 아비갈과 동침하여 저를 낳았으며 아비갈은 요압의 어미 스루야의 동생이더라』

    압살롬은 나중에 모반의 과정에서 요압이 아닌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았다. 소위 토사구팽 당한 것이다. 이렇게 요압은 압살롬의 귀환에 직접적인 공로자였지만 그의 야망과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국 솔로몬 왕 즉위 후 최후를 맞이한다.

    (왕상 2: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그래서 잠언 5:22에 말하기를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인다’했다. 이처럼 요압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 씨앗을 심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결국 상실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오늘날 성도님들은 어떤 씨앗을 뿌리고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가? 우리 인생의 정원에 삐뚤어진 욕망의 씨앗을 뿌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나중에 가시가 되어서 나를 찌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울타리 쳐주신 우리 인생의 정원을 가시밭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밭이 되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랑, 공의, 감사, 희락, 선하고 아름답고 좋은 씨앗들로만 뿌리길 바란다. 머지않은 미래에 천국의 향기가 가득한 정원을 가꾸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둘째, 다윗은 ‘방관’의 씨앗을 뿌려 ‘해악’의 열매를 맺었다.

    (삼하 14:14)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을 다시 모으지 못함 같을 것이오나 하나님은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방책을 베푸사 내어쫓긴 자로 하나님께 버린 자가 되지 않게 하시나이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나단 선지자의 비유와 비교할 수 있다. 나단 선지자의 비유는 다윗을 책망해서 그 양심과 신앙을 바로 잡았지만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판단을 혼미케 해서 공의를 보지 못하게 했다. 즉, 다윗의 부성애와 왕통 계승의 대의명분을 앞세워 압살롬을 귀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살인에 대한 책임과 처벌의 과정을 아주 조치 없이 덮어버리게 만들었다.

    드고아 여인의 비유에는 현실과 다른 맹점이 숨어 있다. 비유 속 살인한 아들은 우발범이지만 현실의 압살롬은 치밀하게 계획 살인한 자였다. 또 그 아들마저 죽으면 집안의 대가 끊긴다고 했는데 현실의 압살롬은 독자는 아니었다. 압살롬 외에도 다른 왕자가 많다. 아도니야도 있고 솔로몬도 있다. 만약 압살롬이 왕위 계승자로 마땅치 않으면 다른 합당한 아들을 세우면 된다. 즉 압살롬이 유일한 옵션은 아니었다. 이처럼 드고아 여인의 비유는 다윗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다윗은 범죄한 압살롬을 아무런 조치 없이 귀환하게 명령한 행동은 공의로 나라를 통치해야 하는 왕으로서 매우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잠 16:12) 『악을 행하는 것은 왕의 미워할 바니 이는 그 보좌가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 섬이니라』

    왕통 계승이라는 대의 명분에 하나님의 공의를 등지는 선택을 한 다윗은 결국 제 발등을 찍게 된다. 귀환한 압살롬이 오래지 않아 왕이 되겠다고 모반을 일으킨다. 어제 형제를 죽이더니 오늘은 아버지를 죽이겠단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겠다고 하는 패륜의 길을 걷는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 주변에는 나단이 주는 비유가 있고 드고아 여인의 비유도 들려질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나를 아프게 할지라도 양심과 신앙을 바로 세우는 음성인가 아니면 꿀같이 달고 명분도 세워주는, 그러나 공의와 정의는 무너뜨리는 악한 음성인가? 부디 선한 것에 기울이고 악한 것은 귀를 막고 거절할 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겠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정원에 가시와 독초가 자리지 않고 향기롭고 형형색색 아름다운 꽃이 가득하게 하는 비결임을 깨닫는 저와 성도가 되자.

    (욥 34:3-4) 『[3]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별하나니 [4] 우리가 스스로 옳은 것은 택하고 무엇이 선한가 우리끼리 알아보자』

    셋째, 압살롬은 ‘분노’의 씨앗을 뿌려 ‘파멸’의 열매를 맺었다.

    압살롬은 사람이 범죄 했을 때 적절한 징계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얼마나 괴물 같은 존재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은 압살롬의 외모에 대해서 기록하기를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흠잡을 데가 없었다고 했다.

    (삼하 14:25) 『(25) 온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저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그의 외모가 이렇게 출중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압살롬은 처음에는 그의 영혼의 정원에 ‘분노’의 씨앗이 심겼다. 그리고 또 다른 씨앗이 뿌려졌다. 왕위에 대한 ‘욕망’이란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혐오’의 씨앗도 뿌려졌다. 이런저런 씨앗이 뿌려졌더니 나중에 시간이 지나니까 영혼의 정원 안에 독초와 가시가 가득했다. 이처럼 형제를 죽인 그 행동이 잘 처리되지 않은 결과 이제는 아버지까지 죽이고 왕이 되려는 패륜아가 되었던 것이다. 만약 암논을 죽인 책임을 지우고 잘 처리했다면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압살롬은 외모는 훌륭했으나 그의 영혼은 분노와 욕망과 혐오의 감정으로 일그러진 프랑켄슈타인 괴물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 괴물은 다윗 왕 측근의 모반 진압 작전에 의해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분노와 욕망과 혐오의 씨앗이 심겨진 그의 인생의 정원은 결국 독초와 가시와 엉겅퀴가 자라 타인의 손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갈 6:8)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오늘날 우리는 어떤 씨앗을 뿌리고 있는가? 또 나중에 언제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내다보는가? 인생의 정원에 뿌려지는 말의 씨앗, 행동의 씨앗, 생각의 씨앗을 잘 관리해야겠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사람의 음성은 걸러내고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고 받아들여야겠다. 반대로 내가 뿌리는 말과 행동의 씨앗이 타인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겠다.

     

    롱펠로우 시인의 ‘화살과 노래’라는 시.

    내가 쏜 화살은 어디로 날아갔을까?

    한순간에 저 너머로 사라진 그 화살을

    바라본들 볼 수 있을까?

    /내가 부른 노래는 어디로 울려 퍼졌을까?

    한순간에 저 머너로 울려 퍼진 그 노래를

    귀 기울인들 들을 수 있을까?

    /먼 훗날 세월이 흘러 흘러 흐른 뒤에야

    나는 다시 보았네, 떡갈나무 밑동에

    그대로 박혀 있는 옛 모습 그 화살을

    /먼 뒷날 시간이 가고 가고 간 뒤에야

    나는 다시 들었네, 친구의 가슴에서

    그대로 울리고 있는 그 시절 그 노래를

     

    오늘 내가 쏜 화살이 타인의 가슴에 박힌다. 오늘 내가 부른 노래가 타인의 가슴에 남는다. 주님이 공급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항상 지혜롭게 분별하고 바르게 행동하고 신중히 선택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