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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9항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

    제9항 구원에 대한 우리의 믿음

     

    구원은 본래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성령을 힘입어 성결을 이루도록 추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성경교훈의 실천에 힘쓴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 초월적인 세계를 ‘위’로 표현합니다. 반면 인간이 거하는 현실 세계를 ‘아래’(땅)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구원이 ‘아래’에서 ‘위’로 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시작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러한 방향성은 여느 종교와 기독교를 비교할 때 다른 종교는‘자력종교’(자기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인 반면 기독교는‘타력종교’(절대자의 섭리로 은혜로 구원을 얻는 종교)라고 일컫는 근거가 됩니다.

    (요 3:31)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 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인간은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인류는 사망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인간은 질병, 장애, 소외, 가난 등 다양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과연 스스로의 능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을까요?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 가능성에 대해서 시험하신 기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 백성들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주십니다. 과연 인간이 스스로 율법을 완전히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실험하신 것이었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받은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고 자신있게 ‘다 지키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다’는 것이 나중의 결론이었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기능만 할 뿐 인간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무능했습니다. 비유컨대 율법은 엠.알.아이(MRI)라는 의료 장비와 같습니다. 이 장비는 인간의 몸을 단층 촬영하여 병의 환부나 암세포가 어디에 분포했는지 자세히 보여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암세포를 죽이고 치료하는 기능은 전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 계신 하나님이 땅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위에 계신 하나님이 스스로 육신이 되셔서 아래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거합니다. 만약 율법을 지켜서 하늘에 오를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육신으로 내려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이런 사실들에는 하나의 방향성이 발견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켜서 구원에 이르려는 시도는 ‘아래에서 위로’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위에서 아래로’ 라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래에서 위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입니다. ‘위에서 아래’로 시도된 것들은 인간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두 이루신 것들입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은 인간이 관연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십자가 공로를 믿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로 거듭나는 제도를 세우신 것도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인류 구원의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의지대로 계획하시고 성취하신 일입니다. 여기까지는 위에서 아래로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면 이제 인간이 시도해야할 일은 단지 그분이 은혜로 내려주신 것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인간의 공로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의 구원을 ‘은혜’라고 합니다. 또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표현은 우리 구원의 성격이 공로와 노력의 대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구원은 인간의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 피흘려 주셨지만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둘로 나뉘는 기준이 될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그 길이 나뉩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3:27)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하나님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절대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그 절대의지를 닮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지는 양날의 검입니다. 이는 인간이 로봇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라는 축복의 의미도 있지만 혹시 잘못 선택할 경우 그것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저주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느냐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여 믿고 세례를 받을 수도 있고 부정적으로 반응하여 불신하고 세례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선택이 바로 구원과 저주의 길을 가르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책임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한 인간 자신의 책임입니다. 따라서 세례는 구원에 대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눅 7:29-30)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위의 두 구절은 믿고 세례를 받는 여부가 구원과 저주의 분기점이 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느냐 저버리느냐의 분기점이 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모든 인간이 자신의 십자가 ‘은혜’를 부어주신데 대해 ‘믿음’으로 반응하기를 기대하십니다. 아담은 자기의 자유의지를 동원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의 음성을 따르는 불신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불신’으로 깨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믿음’으로 회복되기를 원하십니다. 결국 구원이란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할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바늘 가는데 실 가듯이 믿음이 있으면 마땅히 세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요, 천국까지의 구원의 경주로에서 그 출발선에 서는 것입니다.

    (갈 3: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벧전 1: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3)하나님의 약속은 은혜로 주신 것이며 믿음은 약속에 대한 응답 입니다.

    ‘약속’이란 단어는 하나님께 속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는 주체이십니다. ‘믿음’이란 단어는 인간에게 속합니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믿는 주체입니다. 또 약속과 믿음의 선후 관계를 따지면 무엇이 먼저 있을까요? 먼저 약속이 있고 믿음이 나중에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존재해야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런 약속도 주지 않으셨는데 인간의 믿음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믿음을 겨냥한 것이고 믿음은 약속에 구속됩니다. 이렇게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하나님은 ‘믿음’이라는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류 시조 아담처럼 ‘불신’으로 반응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천년 전 예루살렘에 그리스도를 십자가 달리게 하심으로써 인류에게 임한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는 충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사랑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어떤 불신의 핑계도 늘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 희생의 은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해야 마땅합니다.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4)성도는 성령을 의지해 성결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은 신앙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우리가 ‘이미’ 구원은 받았다고 선언하기도 하지만 ‘아직 아니’라고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이미 임했지만 천국은 앞으로 임할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모순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이 계속 진행되고 있는 특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비유컨대 두 나라가 전쟁을 치를 때 한 나라가 승리해서 다른 나라가 항복하고 종전을 선언했지만 아직까지 각 전투 지역에까지는 승전보가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승전보가 전달되고 정전 통보가 전달되기까지 아직도 부분적으로 총알이 날아가고 포사격이 계속되듯이 우리의 구원도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 때문에 성도의 삶 속에 고난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히 10: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성도는 삶 속에서 때때로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을 통해 죄의 세력에게 고통당합니다. 그러나 낙심하고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을 아시고 하나님이 성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의지하고 살아갈 때 그분께 위로받고 힘을 얻고 고난을 이기게 해주십니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무엇을 간구해야 할지 모르더라도 우리 안에 부어주신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도는 이렇게 자신 안에 부어진 하나님의 영을 의지하여 육신의 소욕을 좇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좇아 순종하며 이 땅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죄의 권세를 이기고 죄의 유혹을 이기는 승리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풍성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롬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5)성도는 하나님 경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천국 백성인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최고의 법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도 크게 둘로 양분하면 바로 이 두 가지입니다. 십계명도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 1계명부터 4계명까지는 하나님 사랑에 대한 법이요, 5계명부터 10계명까지는 사람 사랑에 대한 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가장 큰 계명, 가장 상위의 법이 바로 이 법임을 천명하셨습니다.

    (마 22:37-39)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롬 13: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롬 3:31)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6)성도는 소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범해서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며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들을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요일5: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처럼 성도의 신앙 생활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바로 사랑의 완성이며 사랑은 천국 백성이 갖추어야 하는 최고의 덕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13장에서 성도가 품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우리의 내적인 형상, 인격, 성품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최고의 계명을 인식하고 나의 내적 형상, 인격, 성품이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노력을 경주해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경주할 때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천국을 이루시고 비록 이 땅에 살더라도 하늘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마음 속에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천국에 대한 소망, 그리스도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이렇게 신앙이란 탁자의 상판을 떠받치는 세 개의 견고한 다리가 되어야 합니다.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세례는 반드시 물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세례는 반드시 물속에서 받아야 하는 것인가요?

    세례는 헬라어로 ‘침수(浸水)한다’는 동사 ‘밥티조’(baptiz)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밥티스마’(βἀπτισμα)라고 합니다. 이를 영어로는 ‘뱁티즘’(baptism)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와 같은 세례의 어휘적 뜻에 따르면 ‘세례’보다는 ‘침례’가 더 정확한 번역입니다. 신약 성경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세례’는 ‘침수’로 시행되었음을 간접적인 증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들이 많음이라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주니 거기 물들이 많음이라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3:23)

    물에서 올라가실새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

    물에서 올라갈새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흔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행8:39)

    와 같은 표현은 침례를 행했다는 증거입니다. 또한 기독교 역사 자료를 제시한 여러 문헌들을 살펴보면 초대 교회에서 시행한 세례는 물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물속에서 받아야 합니다.

    성경은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의 죽으심에 우리가 참여하게 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하게 하는 예식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 세례를 통해서 물속에 잠기고 물속에서 올라오는 세례의 예식이 이와 같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그렇기 때문에 세례는 본래의 성경의 모습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물에서 잠기는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행해지는 하나의 중요한 의식(儀式). 육체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남을 상징하는 의식인데, 새 신자들은 세례를 통하여 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세례를 뜻하는 그리스어 밥티스마(βπτσμ)는 ‘침수(浸水)한다’는 동사에서 나온 말인데, 원래의 세례는 몸통을 물속에 잠그는 침례(浸禮)예식이었기 때문이다.’

    두산세계대백과

     

    “헬라어 원어의 뜻은 ‘침수’. 초대 교회에서부터 시행된 그리스도인의 입교 의식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41)

    . 그러나 세례의 발단은 구약 시대의 할례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창17:10,11)와 결례(레 11장 이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세례 요한의 세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세례의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물을 붓거나 떨어뜨리는 경우를 세례라고 하고 물에 잠기는 것을 침례라고 부른다. 침례가 본래의 의식이나 세례도 초대 교회부터 시작되었다. 중세까지는 주로 침례가 시행되다가 종교 개혁 이후에는 세례가 보편화되었다. (하략)”

    기독교사전. 기독교문사

     

    이러한 세례(침례)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주라고 명령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증거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 (요1:33)

    . 또한 이처럼 세례자 요한이 베푼 세례의 기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바리새인들과의 대화 가운데서도 간접적으로 인정하신 것 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무슨 권세로 가르치느냐는 물음에 예수께서는 오히려 반문하시기를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인지 사람으로부터인가?’를 물으셨고. 누구든 이 물음에 하늘로부터라고 대답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20:4)

    . 누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느냐 받아들이느냐의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이해했습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7:29-30). 이와 같은 사실들을 근거로 볼 때 세례는 분명히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 참예수교회는 왜 세례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깁니까?

    바울 사도는 로마서 6장에서 언급했듯이 기독교 세례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대해서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에게만 구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세례는 십자가 사건처럼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천 년 전 공생애의 세 번째 유월절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예루살렘 영문 밖 골고다 언덕이라는 공간적 배경에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거듭나는 사건도 머리로만 이해하거나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세례를 통해서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에서 십자가와 연합하는 역사적 사건이어야 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침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롬6:3-5)

    너희가 세례(침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골2:12)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빌3:10-12)

    성경은 세례가 단순히 형식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 죄 씻음(Washing sins)

    사도들은 세례가 죄를 씻는 효과가 있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침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2) 칭의(稱義)또는 의롭다 칭함(Justification)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의롭다’고 여긴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롬6:6-7)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고전6:11)

    3) 중생(Regeneration)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사람이 거듭 태어난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4) 구원(Salvation)

    예수님과 사도들은 세례를 통해 인간이 구원에 이른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믿고 세례(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침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3:21)

  • 안식일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은 안식일은 율법과 함께 폐지되었기 때문에 지킬 필요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안식일을 반포하시는 것은 맞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명확하게 들어가 있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출20:8)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신5:13)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안식일은 율법 이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일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부터 정하신 날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 하나님의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니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1-3)

    뿐만 아니라 안식일은 세상 끝 날까지 존재할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마24:2)

    따라서 안식일은 구약시대에만 한시적으로 지켜야 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변함없이 지켜야 하는 거룩하고 복된 날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많은 주일일 준수자들은 기독교인이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에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1)구원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의 피와 주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롬3:25,28)

    2) 성도는 십계명을 폐할 수 없고 계명을 범해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운다고 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3:31)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롬6:15)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마19:17)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고전7:19)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 (계12:17)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계14:12)

    율법의 규례는 십자가에 의해 폐해졌으므로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2:15)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골2:14)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골2:16)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9:10)

    우리는 형식적인 방식으로 의식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완성은 십계명을 제거하거나 오용하거나 왜곡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의 도움을 통해서 율법의 ‘정신’을 지켜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것은 율법의 형식을 지키는 것보다 더 높은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문자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5:17-18)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마5:21-23)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히8: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약2:10-12)

    3) 성도가 은혜 아래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구약에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사 행하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엿새 동안은 일하고 제 칠일은 너희에게 성일이니 여호와께 특별한 안식일이라 무릇 이날에 일하는 자를 죽일지니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출35:1-3)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 거할 때에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그 나무하는 자를 발견한 자들이 그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의 앞으로 끌어 왔으나 어떻게 처치할는지 지시하심을 받지 못한 고로 가두었더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 온 회중이 곧 그를 진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를 쳐 죽여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니라 (민15:32-36)

    은혜 아래서의 안식일 준수는 속박과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쌔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12:1-2)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막3:1-2)

    에덴동산에서처럼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치료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안식일을 통해서 주님이 공급하시는 영육의 축복을 즐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식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모세가 가로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그것을 들에서 얻지 못하리라 (출16:23-25)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눅12:9-13)

      (요5:1-18)

  • 어떻게 해야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동일한 질문을 이미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했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명확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3:5) 

    물로 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의미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딛3:5)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세례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2:38)

    이제는 왜 주저하느뇨 일어나 주의 이름을 불러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 하더라 (행22:16) 그리스도로 옷 입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갈 3:27)

    그리고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성령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고전 12:13)

    성령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천국의 기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6-17)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13-14)

    거듭남(중생)은 천국에 들어가는 첫 걸음이자 필수조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대로 물과(물침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이전까지의 삶의 모습을 버리고 성경 교훈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 14:15)

    이 사실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구원을 향해 걸어가는 삶입니다.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 16:16)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 참예수교회는 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나요?

    1)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세 위격, 즉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계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신관(神觀)에 관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라는 표현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음은 물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신관과 충돌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시니 (신6: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주시라 (막12:29)

    삼위일체 사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상 세 분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성경은 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은 어떤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지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유일하신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구속사(救贖史) 안에서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구속의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동시에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구속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버지, 아들, 성령의 형태로 계시다가 그 사역을 마치셨을 때 근본 하나님의 본체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15:22-28)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2:35)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행3:21)

     

    즉,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말씀하고 있는 반면 삼위일체 사상은 하나님께서 항상 세 위격의 형태로 계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2)한 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28:19-20)

    이 구절에서 “이름”은 헬라어 원어(원어 기호와 발음 추가)로 보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분이심을 의미하고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세례를 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음을 보게 됩니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행2:2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하니라 (행10:48)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행19:5)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요일5:20)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이것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 즉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육신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골1:15) 성경에 그와 관련된 구절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사9:6)

    열방은 모였으며 민족들이 회집하였은들 그들 중에 누가 능히 이 일을 고하며 이전 일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그들로 증인을 세워서 자기의 옳음을 나타내어 듣는 자들로 옳다 말하게 하라 (사43:9)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는 나의 증인, 나의 종으로 택함을 입었나니 이는 너희로 나를 알고 믿으며 내가 그인줄 깨닫게 하려 함이라 나의 전에 지음을 받은 신이 없었느니라 나의 후에도 없으리라 (사43:10)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행4:12)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요8:25-27)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14:9)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행20:28)

    그가 또 가로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저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행22:14)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딤전3:16)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계22:13)

    3)삼위일체는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바로 니케아 공의회(주전325년)에 기원을 둡니다. 이 회의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우스파가 이단으로 정죄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는 동일 본질이라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니케아 신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니케아 신조는 사도 신경, 아타나시우스 신경과 함께 오늘날 카톨릭의 주요 신조 중 하나입니다.) 삼위일체 사상은 바로 이 니케아 신조를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니케아 신조에 보면 “아버지는 창조주시며,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나셨으나 만들어지지는 않았으며 아버지와 동일본질이시다,” 라는 부분이 나오게 되는데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로부터 나셨다는 이 부분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 영원하다는 부분과 모순이 됩니다.

    또한 삼위일체 사상을 가장 잘 정리한 아타나시우스 신경의 26항을 보면 삼위가 함께 영원하며 동등하다고 되어 있는데 33항에서는 성자에 대해서 신성으로는 성부와 동등 되나 그의 인성으로는 성부보다 낮으신 분이라 말하는 모순된 이론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삼위일체는 모순된 신학 사상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4)삼위일체는 인간의 사상에서 나온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타나시우스 신조의 마지막 항에는 이 신앙이 참되며, 이 신앙을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개신교에서는 이 부분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대로 삼위일체는 성경적인 교리가 아닌 인간의 생각에서 나온 사상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본회는 삼위일체의 신앙을 인정하지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을 가집니다.

     

  • 오순절 날 제자들이 했던 방언은 외국어가 아닙니까?

    오순절 날 방언은 외국 방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20명이 모여 서로 외국말을 했을 때 밖에 있는 사람은 소리가 섞여서 태어난 곳 방언으로 들을 수 없습니다.
    2)여러 다른 지방(15곳)의 언어로 알아들었습니다(행2:11)
    3)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 어떤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행2:13)

    4) 본래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을 말함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이나(고전14:2), 하나님께서 각지에서 온 경건한 유대인들로 하여금 방언을 통역하게 하는 은사를 허락하셨던 것입니다(고전12:30)
  • 마귀로부터 온 방언도 있습니까?

    사람이 성령을 받게 되면 육체적인 진동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영, 곧 악한 영을 받은 사람도 역시 진동할 수 있습니다.

    1) 성령을 받아서 하는 진동은 질서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동안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손뼉을 치며 영가를 부르기도 하지만 성령의 기도를 마치고 나면 평소의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특징입니다. 한 사람의 영언이나 영가는 구별되고 힘이 있으며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령으로 충만 된 후에는 매우 평안하고 영적인 즐거움이 넘치게 됩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요7:38)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14:32-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고전14:39-40)

     

    2) 마귀의 영을 받아서 하는 진동은 질서가 없습니다.

    울거나 웃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않고 거칩니다. 얼굴과 몸의 움직임이 괴상합니다. 악령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제지(制止)를 받지 않습니다. 거짓 영언을 말하는데, 그 소리는 짧고 빠르며, 모호하고 약합니다. 영언에 비해서 입술에서 나는 소리를 하며 오성(悟性)-인지할 수 있는 기도소리-이 많이 섞이기도 하고 외국어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때로 귀신들린 사람은 과격하고 지나치게 행동합니다. 그런 자는 거만하고 자랑하며 스스로를 예수 또는 성령이라고 하며, 구약의 위대한 성도로 자칭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하지만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후11:14) 그 내용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왜곡하는 것입니다. 사단의 영가는 대부분 세상의 유행가풍에 속한 것입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음의 자주성(自主性)을 잃고 의식불명이 됩니다. 그런 사람은 괴성을 지르거나 중얼거리게 됩니다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사8:19) 사령에 사로잡힌 동안 몹시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을 진 것 같으며 바닥을 구르기도 하고 입에 거품을 물기도 합니다. 몸에 경련이 일어나기도 하고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고통을 가하기도 합니다. 얼굴이 창백하고 손발이 찹니다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삼상18:10)

    ㅇ (사8:19)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막5:5)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이었더라 (막9:8)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요3:31)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요일4:3)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요일4:5)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와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16:16-18)

  • 주일 준수의 시작이 언제인지 알고 계십니까?

    주님과 제자들이 안식일을 폐지하지 않았다면 누가 폐했다는 말일까요? 어떻게 ‘주일’이라고 부르는 일요일이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대치했을까요?

    1) 로마 카톨릭이 안식일을 변경할 권한을 주장함

    ➀ 로마 카톨릭에서는 “하나님의 교회(즉 카톨릭 교회)는 안식일 성회를 주일(일요일)로 분별해서 변경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Catechism of the Council of Trent, Donovan translation, 1829, p. 267)

    ➁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 일요일 휴무로 변경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가 이양된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이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일요일을 준수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카톨릭 교회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Mgr. Segur, Plain Talk About the Protestantism of Today, p. 213).

    2) 일요일 준수가 시행됨

    ➀ A.D. 321년 3월 콘스탄틴 황제의 포고에 의해 정해진 굴욕적인 일요일 제정은 기독교 세계에서 계속 시행되었다.

    ➁ 일요일을 일컫는 ‘주의 날’이라는 용어는 A.D. 387년까지 첫 법령 이후 두 세대 동안 공식적인 결정이 나타나지 않았다(“Sunday,” Schaff-Herzog Encyclopedia of Religious Knowledge, Vol. 11, p. 147).

    ➂ 일요일 준수는 세속 권력의 공식결정에 의해 일요일 활동이 규제됨으로써 점차적으로 기독교계에 자리잡게 되었다.

    3) 주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없음

    ➀ “안식일 대신 일주일의 첫날인 일요일을 안식일로서 준수하라는 어떤 명령이 존재하는가? 전혀 없다. 그리스도도, 사도들, 그리고 사도교회 성도들도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대신해서 일주일의 첫날을 기념하지 않았다”(New York Weekly Tribune, May 24, 1900).

    ➁ 에드워드 히스콕스(Dr. Edward T. Hiscox) 박사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날은 일요일은 아니다. 그러나 부활의 개선과 함께 안식일은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전환되었다고들 흔히 이야기한다.…… 그런 전환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는가? 신약 성경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다.”(The New York Examiner, November 16, 1893).

    4) 카톨릭이 십계명을 변경함

    ➀ “로마 카톨릭 교회는 제 사계명을 변경하여 안식일을 폐하고 일요일을 성일로 대치했다”(N. Summerbell, History of the Christians, p. 418).

    ➁ “일요일은 천주교의 관습이다. 그래서 천주교의 원칙에 입각해야 이 날의 준수를 변호할 수 있으며 ……성경은 시종 주마다 드리는 대중예배를 매주의 끝날에서 첫째 날로 변경하는 것에 변호하는 구절은 단 한 마디도 없다”(Catholic Press, Sydney, Australia, August 25, 1900).

    ➂ “카톨릭 교회는……신성한 사명에 의거하여 토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였다”(Catholic Mirror, Baltimore, September 23, 1893).
    ➃ “질문: 어느 날이 안식일인가?

    대답: 토요일이 안식일이다.

    질문: 왜 우리는 토요일을 지키고 않고 일요일을 지키는가?

    대답: 라오디게아 회의에 의해(주 후 364년) 천주교회가 이 의식(儀式)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고쳤기 때문에 우리는 일요일을 지키고 토요일을 지키지 않는다.”(Rev. Peter Geiermann, C.S.S.R., The Convert’s Catechism of Catholic Doctrine, 3rd edition, 1913, p. 50, a work which received the “apostolic blessing” of Pope Pius X, January 25, 1910).

    ➄  “일곱째 날인 안식일은 라오디게아 회의에서 폐하는 것으로 결정되기 전까지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에 의해 지켜졌었다. 라오디게아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주의 날을 준수할 것을 결정하였다”(Prynne’s Dissertation on the Lord’s day, pp.33, 34, 44).

    5) 카톨릭은 계명을 변경할 권세가 없다.

    “질문: 로마 카톨릭이 축일의 계율을 제정할 권세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있는가?

    대답: 로마 카톨릭이 그런 권세가 없다면 모든 현대의 맹신자들이 동의하더라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카톨릭은 일곱째 날인 안식일 준수 대신에 첫째날인 일요일을 준수하는 것으로 대치할 수 있는 성서적 권력은 없다”(Rev. Steven Keenan, A Doctrine Catechism, p. 174, New York: Edward Dunigan & Brothers, 1851).

  • 방언은 은사 중에 하나입니까?

    은사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은사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주신 것이며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7)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고전12:11)

    2) 반드시 교회에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2:7)

    ※그런데 성령 받은 증거의 방언은 믿는 사람은 다 해야 합니다.

    첫째, 오순절 날 120명이 다 성령을 받고 방언을 했고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그 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행1:15)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행2:1-4)

    둘째,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행19:2)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행19:6)“라고 했으며

    셋째, 바울은 또 고린도 교회에게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고전14:5)”라고 했고

    넷째, 그리고 방언은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14:4)

    ※위의 네 가지 경우의 방언은 은사의 방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고전14:13)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고전1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