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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복음 메세지] 안식일에 대한 믿음(기본신앙8)

    [복음 메세지] 안식일에 대한 믿음(기본신앙8)

    참예수교회 기본 신앙 전문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복 주신 거룩한 날임을 믿는다. 이 날을 은혜 아래 창조와 구속의 은혜를 기념하고 내세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지킨다.”

    지난 시간에 안식일이 언제인지 말씀드렸습니다. 안식일은 일곱째 날이며, 오늘날로 치면 토요일입니다. 이 안식일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께서 정하신 날로서 변한 적이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안식일을 준수할 것을 명하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이 안식일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안식일을 준수하는 의미와 방법에 대해 성경적으로 살펴보고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안식일 준수의 의미: 구별되는 표징
    출애굽기 31장 12절부터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안식일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표징’입니다. 즉,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백성과 그렇지 않은 자들을 구별하는 표가 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대대로 지킬 영원한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언약 관계가 유지되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시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곧 하나님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재앙으로부터 보호하셨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안식일을 지킬 때도 하나님의 구별된 보호와 은혜를 받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 중 하나가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느헤미야 역시 안식일을 범하여 멸망당했던 과거를 교훈 삼아 철저히 안식일을 지킬 것을 강조했습니다.

    2. 안식일 준수의 의미: 창조주와 구속주를 기억함
    출애굽기 20장 8절부터 11절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일은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인정하고, 우리는 그분이 만드신 ‘피조물’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또한 신명기 5장 14절부터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또 다른 이유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종살이에서 ‘구속(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창조 사역과 구원 사역이 동전의 양면과 같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새롭게 창조해 가고 계십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창조 사역입니다. 안식일은 바로 그 은혜 안에서 우리가 새 힘을 얻고 재충전되는 복된 날입니다.

    나아가 히브리서 4장 9절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식이 남아 있다고 말씀합니다. 일주일에 한 번 지키는 안식일은 장차 들어갈 영원한 천국 안식을 맛보고 준비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안식일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영적인 맛을 보아야, 영원한 안식을 사모하며 그곳에 들어가기를 힘쓰게 됩니다.

    3.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방법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구별하여 지킨다’는 뜻입니다. 6일 동안은 우리의 일을 힘써 하되, 일곱째 날만큼은 하나님 중심의 날로 구별해야 합니다.

    이사야 58장 13절부터 14절은 안식일에 자기의 길로 행하지 말고, 오락을 구하지 않으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내 마음대로 시간을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집중하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가 안식일에 성문을 닫아 왕래를 통제했듯이, 우리도 안식일에는 세속적인 생각과 행동을 통제하고 하나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바쁜 날이어야 합니다. 영적인 제사장으로서 예배하고,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성도를 돌보는 일에 마음을 다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중심으로 하루를 보낼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즐거움과 영적인 성장을 얻게 됩니다.

    4. 안식일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간혹 안식일에 불을 피우지 말라거나 일을 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적인 문구 때문에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하려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안식일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형식과 비판으로 안식일을 지켰지만,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고 생명을 구하는 선을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안식일을 율법적으로 형식에 치우쳐 지키면 안 됩니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것, 그것이 안식일의 참된 의미입니다.

    결론적으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복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이를 소홀히 여기면 믿음이 퇴보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고 사랑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 우리는 더욱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질 것입니다. 안식일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온전히 지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CYH4pGeM0

    설교자 : 장종규 목자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교회 행사] 낮아짐으로 시작하는 한해_교회교육 세족식

    [교회 행사] 낮아짐으로 시작하는 한해_교회교육 세족식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될 때 우리는 늘 다짐합니다. 더 잘 가르치고, 더 열심히 배우며, 더 성숙해지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청주교회의 교회교육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의 발을 씻겨 주는 세족식으로 조금 다른 방식의 시작을 합니다. 바로 ‘낮아짐’으로 한 해를 여는 것입니다.

    이 행사는 단순한 행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그 마음을 오늘 우리의 교회교육 현장에 옮겨 놓는 시간입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구분이 잠시 사라지고, 교사는 학생 앞에 무릎을 꿇으며, 학생은 교사 앞에 조심스럽게 발을 내어놓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깨닫습니다. 교육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관계 위에서 세워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4-15)

    아동부의 작은 손이 선생님의 발을 닦아 줄 때, 학생부의 청소년이 교사의 발을 씻겨 줄 때, 대학부 청년이 교사와 학생들의 발을 씻기며 기도할 때, 교회 안에는 묘한 긴장과 감동이 함께 흐릅니다. 평소에는 장난기 많던 아이도, 표현에 서툴던 학생도 이 시간만큼은 진지해집니다. 누군가의 발을 씻기는 일은 생각보다 깊은 울림을 줍니다. 그것은 “나는 너를 존중한다”는 고백이자, “나는 너를 위해 낮아지겠다”는 결단이기 때문입니다.

    교사들에게도 이 시간은 도전입니다. 우리는 가르치는 위치에 서 있지만, 사실은 아이들을 통해 더 많이 배우는 사람들입니다. 인내를 배우고, 순수함을 배우며, 솔직함을 배웁니다. 세족식은 그 사실을 다시 되새기는 자리입니다. “내가 너를 섬기겠다”는 다짐은 동시에 “나도 배움의 자리로 내려가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학생들에게도 이 경험은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누군가를 섬겨 본 기억, 그리고 나 역시 섬김을 받아 본 기억은 관계를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경쟁과 비교가 익숙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먼저 섬기는 법을 가르칩니다. 성적보다 태도가, 능력보다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몸으로 배우게 합니다.

     

    청주교회는 해마다 이 세족식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섬김은 한 번의 감동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쉽게 높아지려 하고, 쉽게 판단하며, 쉽게 자기중심적으로 돌아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년 다시 무릎을 꿇습니다. 다시 손에 물을 붓고, 다시 발을 씻깁니다. 낮아짐을 연습하지 않으면 공동체는 금세 메말라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교회교육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더 크고 화려한 행사를 추구하기보다 더 깊은 사랑을 선택합니다. 결과보다 더 진실한 관계를 소중히 여깁니다. 세족식은 바로 그 고백이 담긴 시간입니다.

    올해도 우리는 서로의 발을 씻기며 고백합니다.

    “나는 너를 섬기겠습니다.”

    “나는 너를 소중히 여기겠습니다.”

    “우리는 함께 자라가겠습니다.”

    겸손의 자리에서 시작한 한 해가 결국 가장 높은 가치인 사랑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를 소망합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교회 소식] 하나님이 이어주신 새로운 만남

    [교회 소식] 하나님이 이어주신 새로운 만남

    할렐루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안양에서 청주로 오신 장종규 목자님 가정을 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청주교회에 참으로 귀한 가정을 보내주셨습니다. 안양에서 청주까지 삶의 자리를 옮겨 새로운 사명을 품고 오신 장종규 목자님 가정입니다. 이번 걸음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이기에 더욱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익숙한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아온 관계와 정든 교회, 삶의 기반을 내려놓고 새로운 땅으로 향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목자님 가정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습니다. 사람의 계산이 아닌 믿음의 확신으로 한 걸음을 내딛은 모습은 우리에게 큰 도전과 본이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순종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 4)

    목자님은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시는 분이십니다. 설교로만 전하시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의 선택과 태도를 통해 복음을 보여주십니다. 한 영혼을 향한 진심 어린 관심, 상대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인내, 그리고 조용하지만 흔들림 없는 기도의 자리를 통해 우리는 목회자의 본을 보게 됩니다. 목양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사람이며, 관계는 전략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모님 또한 가정을 든든히 세우는 믿음의 동역자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묵묵히 기도하시며 가정이 먼저 작은 교회가 되도록 힘쓰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귀한 본이 됩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세워주는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신앙이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 전체로 흘러가야 함을 배우게 됩니다.

    또한 자녀들 역시 귀한 순종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예민할 수 있는 시기에 학교를 옮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믿음으로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는 모습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 순종의 발걸음 역시 하나님께서 기쁘게 보실 줄 믿습니다.

    청주라는 새로운 환경은 목자님 가정에게 낯설고 조심스러운 자리일 수 있습니다. 문화도, 관계도, 사역의 방식도 하나하나 다시 세워가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라면, 그곳에는 이미 예비하신 사람과 열매가 있을 것입니다. 씨를 뿌리는 시간이 필요하고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하나님은 결코 헛되이 수고하게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 공동체의 자세입니다. 따뜻한 환영의 한마디, 식사 한 번의 초대, 진심 어린 기도 한 번이 목자님 가정에게는 큰 힘이 됩니다. 새로운 사역지는 목자님 가정만의 여정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여정입니다. 함께 짐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함께 웃고 울 때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 공동체를 새롭게 하십니다. 안양에서 청주로 이어진 이 만남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습니다. 목자님 가정을 통해 우리 교회가 더 깊이 기도하게 되고, 더 넓게 품게 되며, 더 단단히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설렘과 긴장을 함께 안고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라면 그 끝 또한 가장 아름답게 완성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장종규 목자님 가정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학생부, 대학부, 사청부가 함께 찬송으로 환영하는 모습)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성도 간증]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고자 합니다_김연숙 자매

    [성도 간증] 사랑의 빚을 갚으며 살고자 합니다_김연숙 자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증을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예전에 교회는 그저 가면 먹을 것을 주고 선물을 주는 곳 정도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굳이 그런 곳을 다녀야 하나, 세상에는 할 것도 많고 다닐 곳도 많은데 왜 교회를 가야 하나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교회를 다니기 전 저는 정말 막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흥을 좋아했고 노래방과 나이트도 정말 좋아했습니다. 한 달이면 25일 정도 가위에 눌렸고 귀신을 체험한 적도 있었습니다. 매일 밤 무서움 속에서 잠들었고 집에 혼자 있을 때는 불을 다 켜고 자야 했습니다.

    몸도 많이 아파 병원을 자주 다녔는데, 장치성 형제와 연애할 때 길에서 쓰러진 적도 있어서 간질병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엄마가 다니는 교회에 와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때가 아영이가 6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참예수교회라는 곳을 다니고 있었고 토요일에 교회에 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화를 내며 엄마에게 왜 그런 교회를 다니냐고, 거기 이단 아니냐며 엄마도 그런 교회 가지 말라고 이상한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후 저는 교회에서 멀리 떨어진 오창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회와 멀어져 살고 있던 중 엄마의 연락을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영은회라는 행사가 있는데 와보지 않겠느냐며 엄마가 데리러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또 싫다고 했고 아직도 그 교회를 다니냐며 오히려 엄마에게 또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도 엄마는 계속 연락하시며 한 번만 나와 보라고, 집에서 아영이와 둘이 있는 것보다 교회에서 놀다가 가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렇게 심심하기도 하고 약속도 없어서 가볼까 하는 마음으로 처음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생각보다 내성적이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입니다. 처음 교회에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의 인사가 오히려 민망함과 반감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도 예배를 끝까지 드리지 않고 집에 간 적도 많았고, 다시 와도 늦게 오거나 교회 행사 때만 나오곤 했습니다.

     

    그렇게 엄마와의 연락으로만 교회에 나오다가 다른 분들과도 연락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루디아·에스더 자매님들입니다.

    처음에는 연락만 받고 카톡이나 문자는 거의 답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연락이 귀찮았고 왜 자꾸 연락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못하면 괜히 미안하고 민망했고, 내가 왜 이래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떤 날은 서프라이즈라며 언니들이 집에 찾아오기도 했고, 어떤 날은 얼굴만 보러 왔다며 오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청주에서 오창까지 가까운 거리가 아닌데,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쯤 당시 믿지 않았던 남편 장치성 형제가 교회에서 잘해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고 분명 돈을 요구할 것이며, 공짜밥이나 공짜로 해주는 것은 나중에 다 갚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남편이 지금은 교회를 너무 잘 다니고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부담감이 커져갈 때쯤 연락을 안 받으면 이제 안 하겠지 생각하고 연락을 끊었었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연락을 해주시고 말씀 구절을 보내주시는 자매님들을 보며 처음에는 왜 이러지, 안 다닌다고 했는데 왜 자꾸 연락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도 또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결국 계속 오는 연락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연락만 하며 지내던 중 교회에도 나와 줄 수 있겠느냐는 권면을 받았고, 주말에 할 것도 없으니 가볼까 하는 마음이 생겨 교회 출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올 때 예배 도중 약속을 잡고 다른 곳으로 간 적도 많았고, 오전 예배가 거의 끝날 때쯤 온 적도 많았습니다. 정말 그냥 놀러 가보자는 마음이었고 점심이나 먹자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교회가 조금 편해질 무렵 교회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었고, 교회 오면 낯을 엄청 가리고 교회보다 키즈카페나 다른 곳이 좋다던 아영이가 교회에서 집에 가기 싫다고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성경공부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면을 당시 청주교회를 시무하시던 이요셉 목자님으로부터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 교회에 왔을 때 목자님께 저는 배우거나 공부하는 것은 절대 하고 싶지 않고 엄마가 오라고 해서 온 것뿐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답을 드릴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교회를 멀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밖에서 언니들만 만나며 지내다가 안식일에는 일이 있다고 말하고 차가 없어서 못 온다고 핑계만 늘어갈 때쯤, 어느 목요일 이요셉 목자님께서 저희 집으로 직접 오셔서 성경공부를 해주시겠다고 꼭 시간을 내 달라고 연락을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바쁘신 와중에도 와주신 것이었는데 그때는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고 마냥 귀찮게만 느껴졌습니다. 생각할수록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그렇게 몇 번의 권면 끝에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했는데 제 몸에 갑자기 열이 나고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주를 미루게 되었고 다음 주도 이상하리만큼 몸이 아팠습니다.

    더 미루면 안 될 것 같아 오시라고 말씀드리고 마스크를 쓰고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자님께서 안수기도를 해주시겠다고 하셨는데 저는 받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제 몸을 위해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지만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신다는 것이 왠지 부담스러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성경공부가 시작되었고 제 눈높이에 맞춰 알려주시는 내용들이 마냥 새로웠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할렐루야를 외치라고 알려주셨습니다. 제가 가위에 자주 눌린다는 이야기를 들으시고 혹시 그런 꿈을 꾸거나 가위에 눌릴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귀야 물러가라”고 외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 평소보다 더 심하게 가위에 눌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목자님이 알려주신 대로 외치자 정말 가위가 풀리고 꿈에서 깰 수 있었습니다.

    그때 처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후 가위에 눌리는 횟수도 줄어들었으며 무서움 속에서 잠드는 날도 줄어들었습니다.

    그렇게 성경공부를 이어가며 안식일 출석도 다시 하게 되었고 세례를 권면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받을 마음도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던 중 주중에 김경희 자매와 최영미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던 중 자매님들께서 다시 세례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저는 아직 생각이 없다고 말씀드렸는데 갑자기 최영미 자매님께서 시어머니께서 쓰러져 병원에 계신데 세례를 받지 못하고 누워 계신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며, 우리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꼭 세례를 받았으면 좋겠다며 펑펑 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도 갑자기 마음이 너무 아파졌습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마음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세례 공부만 받아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자매님은 너무 기쁘다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시어머니가 쓰러진 순간에도 누군가 세례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큰 울림이었습니다.

    그렇게 세례공부를 시작하고 교회 출석도 열심히 하게 되면서 비로소 교회의 모습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오면 민망하고 낯설기만 했는데, 그때부터는 예배드리는 성도들의 태도와 말씀이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저와 아영이를 챙겨주시는 성도들과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저렇게 아이를 키워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아이들을 대할 때 나라면 벌써 화를 냈을 텐데 저 상황에서 어떻게 저렇게 대처할 수 있을까 하며 배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영이가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는 왜 교회만 오면 착해져?”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만 오면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것 같았고 마냥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교회 생활과 세례공부를 이어가던 중 다시 세례를 권면받게 되었고 이번에는 받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너무 반대하고 있었고 뱃속에는 둘째 아윤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미뤄야 하나 고민했지만 이요셉 목자님께서는 너무 겁먹지 말고 기도하면서 이야기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일주일 정도 기도한 후 남편에게 이야기를 꺼냈는데 의외로 자기에게까지 강요만 하지 않는다면 괜찮다며 허락해 주었습니다.

    세례식 날까지 순탄하면 좋았겠지만 끝난 줄 알았던 입덧이 다시 시작되었고 가위에도 자주 눌렸습니다. 세례식 전날에는 세 시간밖에 자지 못해 몸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렇게 힘든데 세례를 받을 수 있을까 생각도 했지만 세례를 받고 나니 피곤함과 힘듦은 사라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날의 감동은 정말 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저는 교회 생활을 하며 남편도 전도했고 아는 분들에게도 조금씩 교회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제가 전도받을 때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도 들고 감사한 마음도 큽니다.

    제가 참예수교회에 오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속에서 계속 세상의 문화를 즐기며 살았다면 과연 지금 행복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은 교회 안에서 평안과 위로와 기쁨을 느끼며 새로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달라진 제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감사 위에 감사를 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과 이 교회 안에서 믿음을 지키며 성경 말씀을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전하는 성도가 되고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저를 참예수교회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 저를 교회로 인도해 주신 형제자매님들께도 감사드리며 간증을 마치겠습니다.

    할렐루야!

     

    글작성 : 김연숙 자매

  • [복음 메세지]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복음 메세지]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말씀 제목]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수1:1-9)

    [설교자] 장종규 목자

    [설교일] 2026. 2. 6

     

    할렐루야, 성도님들 평안하십니까? 새롭게 발령을 받은 부임지에서 첫 예배를 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새롭다’라고 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기대가 되고 설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도 되고 약간의 두려움도 느끼게 됩니다. 저 또한 기대도 되고요, 한편으로는 ‘아, 제가 잘 감당해야 할 텐데’라는 어떤 그런 걱정 아닌 걱정도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이렇게 새로운 상황들을 만날 수 있고, 또한 생각하지 못했던, 내 힘으로 뭔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내일 어떤 상황이 생길지 알지 못한 채, 우리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런 사명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따라 행하려다 보니 때로는 그런 상황들 속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되는 거죠.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개인, 가정, 교회가 이러한 삶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을 통해 교훈을 얻도록 하겠습니다.

     

    1절.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시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수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지시고 그들을 광야라고 하는 두렵고 무서운 이곳을 지나게 하신 다음에,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 입구까지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거기서 모세는 죽고 그 뒤를 이어서 여호수아로 이 사명을 계속해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굉장히 부담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을 들어간다는 것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곳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는 훨씬 더 신장도 크고 힘도 강했던 가나안 족속들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약 38년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여기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다가 돌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그 땅을 차지하라고 하셨는데 그 땅을 정탐해 보니 자기들보다 너무 강해 보이는 족속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마치 메뚜기와 같이 보였습니다. 너무 겁을 먹은 것입니다. 사실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다시 광야로 돌아가게 하셨고, 8년이 지난 다음에 이제 다시 이곳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쉽지 않지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명령이고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과 사명은 사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기록되었다고 말씀하십니다(롬15:4). 우리 신약 시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약의 백성들을 통해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 바로 우리가 장차 가야 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이자 명령이며 사명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어야 하는 하나님의 명령도 있고 또 동시에 사명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지금까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11:12)”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은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침노해야 합니다. 침노라고 하는 것은 싸우는 겁니다. 싸워서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들어가는 것은 이와 같이 싸워서 차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후의 말씀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곳 사람들과 전쟁을 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얻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로마서 14장 17절 말씀 보면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될 때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고 누리며, 이제 마지막에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는 것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기 위해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만 합니다. 이런 삶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들어가 그곳의 족속들과 싸워서 그들을 쫓아내고 땅을 차지했던 바로 그런 과정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나라를 혼자서만 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넓혀 가야 합니다. 확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 여리고부터 시작해서 점점 가나안 중부, 남부, 북부로 확대해 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말합니다. 전도를 통해 그들도 하나님을 믿게 되고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하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 사명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나라를 얻고 확장해야 합니다. 언제까지입니까? 하나님 나라에 갈 때까지, 즉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굉장히 큰 부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는 길이기도 합니다.

    3절입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느리고 그 땅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너희 밟는 곳을 다 너희에게 주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실 것이다’가 아니라 이미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이란 걸 생각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 말씀에 보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미 얻은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그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믿으면 그 말씀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정말 믿는다면 순종하겠죠. 우리가 정말 하나님 말씀을 믿는다면 그 말씀대로 행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그렇게 했을 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모든 성경의 말씀이 다 그와 같이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말씀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죠. 그렇게 믿음의 본질은 바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다 주었다”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곳 사람들과 싸운다면 하나님께서 그곳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해서 그 땅에 들어가지 않거나 그들과 싸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역사하는 힘이 많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 말씀 보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뒤의 말씀이 바로 그런 내용인데,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고 그 믿음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문제가 될 것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보다 훨씬 강한 아낙 족속이나 하더라도 하나님하고 상대가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나와 함께하셔서 나를 도와주시고 지켜 주신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내가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만 하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도 사실 그런 의미입니다. 양이 목자와 함께 있다면 아무런 부족함이 없습니다. 목자가 양이 필요한 것들을 다 제공하고 쉴 만한 곳으로 인도합니다. 심지어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곳을 지난다고 하더라도 목자가 함께 만 있다면 양은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어떻게 함께하십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본질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라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하수 유브라데에 이르는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편 대해까지 너희 지경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땅의 지경, 즉 범위가 나옵니다. 이 범위는 사실 굉장히 넓은 지역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이 가나안 지역, 실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곳은 그들이 얻었던 곳보다 훨씬 더 큽니다. 지도를 보면 거의 한 열 배 정도 차이가 날 만큼 굉장히 큰 범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신 약속은 엄청난 것입니다.

     

    이 약속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실 때,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밭 밑에 어마어마한 보화가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 몰랐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고 큰 은혜인가를 알게 된다면 내 모든 소유를 다 판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요. 실제로 성경에 보게 되면 이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생애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동안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걸 다 배설물로 여겼다고 고백하는 바울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릴 때는 가치를 잘 모릅니다. 막 지폐도 가위로 자르기도 하죠. 그러나 크면 가치를 압니다. 신앙에서 성장하면 하나님과 함께한다는 것,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신앙이 성장하지 않으면 이 하나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 잘 모릅니다.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나 혼자 누리기 너무나 아쉬워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알려 줍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알고 누리고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우리가 세상의 삶을 마치게 되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삭제?

     

    우리가 믿는 목적은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천국을 가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천국에 왜 가려고 합니까?”라고 물어본다면 “그냥 좋으니까”라고 답할 수 있겠죠.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우리 삶 속에서 많이 경험해 봐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내가 많이 경험해야 “이게 정말 가장 좋은 것이구나”를 알게 되고 더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6절,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려 한 땅을 얻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를 능히 당할 자 없게 하시고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며 떠나지 않을 것이니 마음을 강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 무슨 말입니까? 믿음을 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눈에 보이는 건 힘센 가나안 족속들입니다. 사람이 눈으로 그런 것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겠죠. 하나님께서 왜 마음을 강하게 먹으라고 하셨을까요?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할 테니 내가 준 명령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나 그런 생각과 마음을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배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를 통해서 우리 성도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매번 필요한 말씀을 보내십니다. 그러면 성도는 그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가시는 곳은 전쟁터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고, 죄의 유혹과 사탄의 방해뿐이기에 그 가운데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면 믿음을 강하게 해야 합니다.

     

    믿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됩니다. 풍랑을 만났을 때 예수님께서 무리를 걸어오셨고, 베드로도 용기를 내어 물에 발을 내렸습니다. 정말 놀랍게도 물 위를 걷게 되었죠. 그런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여 빠져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잡으시며 “의심하는 자여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잡고 믿음으로 가면 기적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기적이 뭘까요? 병이 낫는 것도 기적이지만,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평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기적 아닌가요? 주변에는 평안함이 없어서 늘 불안해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아무 걱정이 없어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려운 문제가 있지만 평안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7절입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함께하시는 방법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 말씀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안 보이지만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건 모호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따라 행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 중심의 신앙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말씀이 중심이 안 되면 그 신앙은 금방 무너집니다. 말씀 자체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그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말씀을 늘 가까이해야 합니다.

     

    8절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하고 동행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알려 주십니다. 입에서 떠나지 않게 하고, 주야로 묵상하고, 그대로 지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매일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말씀을 암송하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날마다 추구한다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힘듭니다. 당연히 힘듭니다.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말씀처럼 힘든 만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입니다. 내 노력과 정성을 쏟는 만큼 나에게 돌아오게 하십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부담되고 행하기 어려운 말씀도 다 지켜 행해야 합니다. 부담되시죠? 하지만 힘들수록 그 안에서 누리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과 힘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고 순종하라 하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분입니다. 무리한 요구처럼 보여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행하기 전에는 피곤해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을 신뢰해서 행하게 되면 그 안에서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입니다.

     

    9절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다시 한번 강조하십니다. “내가 명했으니 걱정하지 말라.” 우리가 담대할 수 있는 근거는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게 됩니다.

     

    저 역시 오늘 처음으로 청주교회 성도님들을 만나게 되었고, 주어진 시간 동안 이 곳에서 목회를 해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걱정도 되고 불안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많은 성도님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을까 고민하면 답이 안 나옵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저도 그 말씀을 믿고 그렇게 하려 합니다. 성도님들도 기록된 하나님 말씀을 믿으시고, 그 말씀을 따라 힘써 행하는 삶을 사신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형통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열심히 순종하는 우리 청주교회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s://youtu.be/ryNq6qEbYX0?si=WsDDc7K9DzgSLdii

    설교자 : 장종규 목자

    글편집 : 김예영 자매

  • [신앙의 향기] 아동부가 하나님께 올리는 향기 – 암송한마당

    [신앙의 향기] 아동부가 하나님께 올리는 향기 – 암송한마당

    여러 교회가 함께 모여 말씀의 기쁨을 나누는 뜻깊은 시간이 열렸습니다. 바로 아동부 암송 한마당입니다. 이 행사는 남부지역 교회들이 한자리에 모여, 아이들이 그동안 정성껏 준비한 말씀 암송과 찬양을 함께 나누는 축제의 자리였습니다.

     

    아동부 암송 한마당은 단순히 암송을 잘하는 아이를 뽑는 행사가 아닙니다. 행사에서 제시된 말씀을 집에서, 교회에서 꾸준히 외우며 준비하고, 그 말씀을 많은 친구들과 선생님들 앞에서 담대하게 선포하는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믿음과 용기가 자라나는 시간입니다. 처음에는 떨리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지만, 또박또박 말씀을 외우는 아이들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또한, 각 교회가 준비한 찬양 발표는 행사의 분위기를 한층 더 밝고 풍성하게 만들었습니다. 함께 손을 들고 찬양하며 웃고, 서로의 무대를 응원하는 모습 속에서 아이들은 ‘함께 믿음을 나누는 즐거움’을 자연스럽게 경험했습니다. 소속된 교회는 달랐지만, 말씀 안에서 하나가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동부 암송 한마당을 통해 아이들은 말씀을 머리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고 입으로 고백하는 귀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하루가 아이들의 신앙 여정 속에 오래도록 남아, 말씀을 사랑하는 씨앗으로 자라나기를 기대합니다. 함께 준비하고 응원해 주신 모든 교사와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행사를 주관하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이들의 믿음이 밝게 자라나는 다음 만남을 소망합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교회 행사] 아동부 포인트 행사

    한 학기 동안 아이들의 웃음과 노력이 차곡차곡 쌓여, 아동부에 아주 특별한 하루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동부 포인트 행사입니다.

    이 날은 아이들이 그동안 열심히 참여하며 모은 포인트를 직접 사용해 보고,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축제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아동부들이 모은 포인트는 성경 통독, 예배 출석, 바른 예배 태도, 말씀 암송 등 아이들의 일상적인 신앙 활동 속에서 하나씩 쌓여 왔습니다. 매주 말씀을 읽고, 예배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집중하려 애썼던 작은 실천들이 모여 포인트가 되었고, 그 결과가 이날 환한 미소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면 이런 기쁜이 있구나”를 몸으로 느끼며 성취감을 경험했습니다.

      

    이번 포인트 행사에서는 특히 다양한 음식이 준비되어 분위기를 더욱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먹거리를 바라보며 어떤 것을 고를지 고민하는 아이들의 눈빛은 설렘으로 가득했고, 계산대 앞에서는 스스로 모은 포인트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이 이어졌습니다. 친구와 함께 나누어 먹으며 웃는 모습, 서로의 선택을 응원해 주는 장면들은 행사장을 따뜻한 에너지로 채웠습니다.

    무엇보다 이 시간이 더 의미 있었던 이유는, 아이들이 포인트의 숫자보다 그 과정의 즐거움을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말씀 외우는 게 재미있었어요”, “예배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라는 말 속에는 한 학기 동안 자라난 아이들의 믿음과 자신감이 담겨 있었습니다.

    아동부 포인트 행사는 아이들에게 즐거운 추억을 선물함과 동시에, 신앙 생활이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이 웃음 속에서 믿음을 키워 갈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함께 응원해 주세요. 한 학기 동안 수고한 모든 아이들과 이를 함께 도와주신 교사, 부모님 그리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작성 : 박은우 형제

  • [성도 간증] 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_박은정 자매

    [성도 간증] 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_박은정 자매

    “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

    이 한 문장은 이 간증 전체를 관통하는 고백입니다.

    이 글은 믿음 안에서의 결혼을 소망했지만 현실의 벽 앞에서 흔들렸던 한 사람이, 오랜 시간 기도와 눈물로 하나님께 매달리며 결국 한 가정이 믿음 위에 세워지기까지의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변화는 빠르지 않았고, 고난은 반복되었지만 간증자는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함께하고 계셨다고.

     

    사람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었던 상황들 속에서, 하나님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길을 여셨고, 결국 기도의 제목이었던 남편은 믿음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무너짐의 시간조차 하나님께서 사용하셨음을 돌아보며, 이 간증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늦지 않으시며,

    포기하지 않는 믿음의 길 위에서

    끝까지 동행하시는 분이시라고.

     

    이 짧지만 깊은 고백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삶에도 위로와 소망이 되기를 바라며, 간증을 소개합니다.

     

    “나와 동행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증하겠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할수 있게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먼저 간증을 하기로 결정한 일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간증에 대해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었는 데 어느날 간증동영상을 보게 되고 그 간증을 보면서 아 그래 옛날에 우리 남편도 교회 가는것 보 다 세상에서의 즐거움을 더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정말 감사하다라고 생각한 날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경추집사님의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번 영은회때 간증을 해보는 건 어떨지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하든 제가 하든 상의해서 알려달라고 하셨는데 참 신기했습니다. 간증을 보게 하시고 그 간증을 통해 우리 남편이 우리 가정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될수 있도록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라고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건 아닐까? 란 생각이 들면서 집사님께 간증을 해보겠다고 답변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준비하려 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함께 나눠야 할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남편을 전도하게 된 일은 예전에 청주교회 50주년 기념호에 있는데 또 얘기를 하는게 맞나? 고민도 되었지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거고 오랜시간이 흘러 다시 한번 나누고자 합니다.

    남편을 처음 알게 된 건 고3때입니다 당시 같은 학교였고 전혀 모르고 지내다가 하루는 전교생이 강당에서 조회를 하는데 그날 저와 친구 한명이 당번이어서 교실을 지키고 있었고 한참을 교실에 있다가 대체 언제 끝나나 싶어 밖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마침 강당에서 우르르 학생들이 나오고 있었고 그 수많은 사람중에 딱 한 사람 지금의 남편만이 환하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친구에게 그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봤는데 자기랑 친하다며 이름과 몇 반인지 성격이 어떤지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그 사람에 대해 듣기만 하고 시간이 흘렀는데 가끔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나오는데 어떻게 그 사람만 보였을까? 그것도 무슨 아우라가 비췬것 처럼 그렇게 그 사람만 왜 보였을까? 참 신기한 일이다 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나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게 아니었을까 란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어쩌다보니 반의 대표로 제가 나가게 되었고 그 모습을 보고 지금의 남편이 저에 대해 알게 되면서 저에게 친구하고 싶다며 편지를 보내게 되고 자연스럽게 이과인 남편과 문과인 제가 편지를 주고받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은 저에게 사귀자고 했고 그 당시에 저는 신앙인이 누군가를 사귄다는 건 그것도 믿지 않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하늘이 무너지는 큰 죄라고 생각을 해서 거절을 했는데 그 일이 상처가 되었는지 그날 이후로 저와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친구를 잃었단 생각에 속상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신앙이 우선이었던 제게 그 일은 후회되지 않았고 대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신다면 언젠가 다시 만나게 하실 거죠? 강당에서 나올 때 그 장면이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난 후 아주 우연히 길에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다시 보게 될까?

    이 사람을 전도하라는 걸까? 란 생각이 들었고 다시 만나게 되면서 부모님께 먼저 인사를 시켰습니다. 이방 결혼은 절대 안 된다, 믿음 안에서 결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부모님은 나중에 안 사실 이지만 처음 만나는 날 반대를 하려고 맘먹고 식당에서 우리를 기다렸는데 식당 문을 열고 둘이 함께 들어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너무 닮아서 왠지 반대를 하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지…

    저희 엄마는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교회 나와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하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그리고 저에게는 이방 결혼은 정말 믿음 지키기 힘들다는 얘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이사람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이방 결혼을 해도 신앙을 지킬 수 있도록 지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함께 갈 때 걱정도 많았습니다. 아직 결혼 전이어서 다른 성도님들이 어떻게 생각을 할까? 그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거부하면 어쩌지? 이런저런 걱정들이 몰려올 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교회에 가야 하는데 이런저런 걱정들 때문에 자꾸만 망설여지는데 어떡하죠?” 기도를 하고 나니 다른 사람들의 시선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까?란 생각이 더 우선이 되었고 남편에게도 교회에 대한 방언에 대한얘기를 미리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교회와 다르다. 우리 교회는 성경에 나온 그대로 행하는 교회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고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한다. 방언 소리가 처음 듣는 사람은 놀랄 수도 있지만 이건 결코 이상한 게 아님을 얘기를 했고 또한 나는 교회가 제일 우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얘기를 했습니다. 처음 교회 가게 된 남편은 많이 어색해하긴 했지만, 다행히 놀라거나 거부하지는 않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토요일이 되면 자꾸만 친구들 만나러 가려하고 여행을 가는 등 핑계를 대며 때론 저도 교회를 갈 수 없는 상황도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 제 머릿속에 ‘신앙에 있어서는 절대 타협을 해선 안 된다는“ 어느 목자님의 설교 말씀이 기억이 났고 나는 안식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교회를 가야 한다. 라고 계속 얘기를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신랑은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 후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는 서울로 가서 살게 되었는데 세례는 받았지만, 아직 신앙이 연약했고 세상의 즐거움을 더 좋아했던 신랑은 안식 일이 되면 교회를 가야 하는데 자꾸 핑계되며 안 가려 하고 세상 친구들 직장동료들과의 모임 등을 중시했고 이런 문제들로 자꾸만 다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사회생활 하다 보면 인맥도 중요하고 그러려면 술자리만큼 친해지기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하는 신랑의 고정관념을 어떻게 하면 바꿀 수 있을까? 최대의 고민거리였습니다.

    믿음 안에 있는 형제들은 술을 마시지 않고도 오히려 더 사회에서 인정받는 다는 것을 어떡하면 알게 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 다 인도해주신 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남편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닌데 천국이 분명히 있는데 그걸 아직 모르는 남편이 너무나 불쌍했습니다. 신랑과 신앙의 문제로 부딪힐 때마다 이방 결혼은 이래서 힘들구나 뼈저리게 느꼈고 나중에 우리 자녀는 꼭 믿음의 가정과 결혼시켜야지 란 생각을 했습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고 또한, 아직 신앙이 연약한 남편을 위해 때론 금식기도도 하면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 가는 것부터 가 먼저라는 생각에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아이들이 좋아하는 사탕이나 과자로 달래듯 저는 남편이 갖고 싶어하는 것을 안식일 예배 빠지지 않고 가면 사줄께~ 라고 달래서 교회를 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같이 교회 갔다 오는 길엔 꼭 이 말들을 했습니다. “ 당신이랑 이렇게 교회 갔다 오니 너무 좋고 행복하다고.“

    그리고 평소 집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장 17절 말씀에 의지하여 억지로라도 말씀을, 찬양을 듣게 하려고 청소할 때나 설거지할 때 말씀을 틀어놓거나 찬양을 틀어놓곤 했습니다.

    가랑비에 옷이 젖어드는 것처럼 언젠가는 남편도 서서히 바뀔 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저의 바람은 내 믿음이 흔들릴 때 나를 바로 잡아줄 수 있는 동역자가 남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였습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결혼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후회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서울에 살때 신랑은 세상에 더 많이 속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혼자 울기도 많이 하고 그때 하나님만이 저의 유일한 안식처였습니다. 정말 그때 하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다면 아마 우울증이 심하게 오지 않았을까? 란 생각도 해봅니다.

    시간은 흘러 둘째가 태어날 때쯤 제가 청주로 내려가자고 신랑을 졸랐습니다. 서울에서 저는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남편은 매일 야근에 회식에 늦게 들어오고 혼자 만삭에 큰아이까지 보는게 너무 힘들었고 이렇게 계속 살다가는 남편은 세상에 더 빠져버리고 신앙은 멀어지겠구나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신앙도 흔들릴 것 같았습니다.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청주에 직장도 없이 무작정 내려와 시댁 어른들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을 지키는 게 쉽진 않았습니다. 이때 또다시 왜 이방 결혼은 안 되는건지 왜 그렇게 믿음 안에서 결혼을 하라고 했는지 친정 부모님의 말이 많이 떠올라 후회를 하기도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고 이건 내가 짊어져야 하는 내 십자가란 생각으로 정말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이라 저녁때면 일 마치고 오신 시댁 어른들과 신랑은 술자리를 즐겼는데 그 모습을 어린 우리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게 저는 참으로 싫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수 있는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댁 어른들과 술을 마시던 신랑이 잠깐 화장실에 갔는데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이 있었고 그날 이후로 ”앞으로 너는 술 마시지 마라“ 라고 하셨고 다시는 술자리를 갖더라고 신랑에겐 술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할렐루야! 역시 멋진 우리 하나님!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 아뢸 때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체험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많은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습니다. 결혼하고도 십일조를 하는 부분에 대해서 신랑은 탐탁지 않아 했습니다. 안 그래도 어려운데 굳이 십일조를 해야하느냐, 이런 부분으로 투닥거릴 때도 있었지만 그럴 때 마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일을 할 수 있었겠어? 당신이 벌 수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셔서 벌 수 있는거야. 그 전부를 드리는 것도 아니고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이고 이렇게 감사하며 십 일조를 할 때 하나님께서 더 축복해주신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도 신랑은 탐탁치 않아 했지만, 청주에서 십일조의 기적을 여러 번 체험하면서 신랑의 마음은 바뀌게 됩니다. 청주로 이사 오고 신랑이 직장을 구하고 첫 월급은 수습이라서 너무나도 금액이 적었습니다. 너무 적은 금액을 십일조 내기 창피한 마음에 십일조보다 더 많은 금액을 냈는데 신기하게도 그 다음 달 십일조 낸 금액만큼 월급이 올랐습니다. 창피하게 생각해서 더 내긴 했지만 이렇게 축복해주신 게 너무 감사해서 두 번째 달은 감사한 마음에 십일조보다 더 냈는데 신기하게 더 낸 만큼의 월급이 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을 신랑에게 얘기하면서 신랑도 신기해했고 그 후로는 십일조 하는 것에 더 이상 반감을 갖지 않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 말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 말씀을 삶에서 직접 체험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청주로 이사하고 교회를 가는 데 그때 당시 교회는 용정동에 있었습니다. 신랑과 애들을 데리고 교회에 가는데 지금은 안 그래 보이지만 그때 당시 신랑은 낯을 많이 가렸습니다. 그래서 교회 가자마자 한 형제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우리 신랑이 낯을 많이 가리는데 옆에서 꼭 붙어서 좀 챙겨줄 수 있겠냐고, 적응할 수 있도록 좀 도와 달라고 부탁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그 형제님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을 하고 그때부터 밀착케어에 들어갑니다. 무엇을 하든 같이하자고 하고 어딜 가든 같이 가자고 하고 절대 혼자 있는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뗄레야 뗄 수 없는 절친?이 되었지만, 그 당시 그렇게 매사에 챙긴다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면 힘든 일이겠지요.

    그리고 교회에서도 무슨 행사를 할때면 신랑이 좋아하는 요리경연대회라든가 탁구 등 모든 초점을 신랑에게 맞춰주는 배려와 성도님들의 사랑에 신랑도 서서히 세상 친구들 모임보다 교회 안에서의 활동들, 성도 간의 교제가 주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청주로 내려와 경제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신랑이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알아가는 모습이 보여서 좋았고 청주에 내려온 지 1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신랑도 성령을 받아서 더없이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드디어 우리 가정이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된건 같아서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간증을 적으며 생각해 보니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성장시키기 위해 참 많은 일들을 하셨구나 란 생각이 듭니다. 최근 들어 때때로 제가 믿음 없는 말을 할 때면 신랑은 오히려 저를 깨우쳐 주는 동역자가 되어있는 지금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내 믿음이 흔들릴 때 잡아줄 수 있는 동역자가 남편이길 바랐던 저의 바람을 하나님께선 기억하시고 이뤄주셨다는 게 참 신기하고도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사실 이렇게 되기까지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가게를 운영하다가 폐업하게 된 일, 우유 판촉 일을 하면서 비바람을 맞았던 일, 사기를 당해서 돈을 날렸던 일 등,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게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하려합니다.

    신랑과 함께 죽 가게를 했었는데 병원 검진 손님들을 상대로 운영을 하다 보니 안식일 오전 예배 참석을 할 수 없었고 안식일을 못 지키는 것에 계속 죄책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계속 기도를 드렸는데 어느 날 꿈에서 우리 가게 앞 도로에 큰 회오리바람이 불면서 모든 가게들이 무너지고 우리 가게도 무너지게 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너진 잔해 속에 작은 빛이 보이고 그 빛이 보호막처럼 신랑과 제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있는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이 꿈이 대체 무슨 꿈일까? 꿈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계속 그 꿈이 무슨 뜻일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이 꿈을 꾸고 얼마 되지 않아 저희 가게는 병원 검진 손님들이 전혀 오지 않았습니다. 알고보니 병원에서 새로 건물을 지으면서 식당까지 운영을 하게 되고 더 이상 검진 손님을 우리 가게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몇 년을 함께 했었는데 아무런 말도 없이 하루아침에 이렇게 되어버리니 저희 가게는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게 되었고 가게를 더 이상 운영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가게 권리금도 돌려받지 못하고 많은 피해를 입으며 정리를하게 되는데 그 당시 경제적으로도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담임 목자님께 기도 부탁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전에 꾸었던 그 꿈이 다시 생각이 났습니다. 다 무너졌지만, 우리를 보호하던 그 빛이 생각 이 나면서 빛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거란 확신이 들면서 그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위해 함께 기도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주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예비하신 하나님께 참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우리 부부가 깨달은 것은 안식일을 우리가 온전히 지키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와 무슨 일이 있어도 안식일을 지켜야겠단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직장을 구할 땐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지가 제일 일 순위가 되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을 구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지만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며 기도했더니 신기하게도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직장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이 오거나 할때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다 알고 계시고 내가 생각지 못하는 방법으로 반드시 하나님의 완벽한 때에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고난이 있어야 신앙이 성장을 하는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지내 온 수많은 날들 속에 평안한 삶만 있었다면 과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란 생각이 듭니다. 고난을 통해 남편은 옛사람의 모습들을 버리고 세상의 가치관들을 버릴 수 있게 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제일이란 생각을 갖게 했으므로 지금은 그 고난이 감사하단 생각이듭니다.

    내가 걸어온 길 길고도 짧은 길

    내 힘으로 걸어온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온 것도 주가 동행함이라

    주님 나와 동행하심이라며

    때론 험한 길에서 폭풍우를 만나고

    때론 가시밭길에서 고난을 당하나

    주님 동행하시니 나는 두려움 없네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동행이라는 찬양의 가사처럼 내 삶에 함께 동행하신 하나님이 계셨기에 모든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남편이 구원을 받았고 신앙이 성장을 할 수 있었고 자녀 또한 믿음 안에서 자라나는 온전한 믿음의 가정이 될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천국 가는 그날까지 온전한 신앙의 집을 잘 세우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드리며 간증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작성 : 박은정 자매

  •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복음 메세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말씀 제목]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눅 12:32)

    [설교자] 김세한 목자

    [설교일] 2025.11.22

    분당교회 즉 전 성남 기도소에 첫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경제적인 형편이 넉넉지 않으니 인테리어 작업을 집사람과 직접했다. 전기톱을 빌려서 계단 하나 높이만한 단을 직접 제단했고 그 위에 붉은 색 융으로 덮었다. 벽면 페인트 칠을 하고 자모 예배실 창문 썬팅 작업도 했다. 그렇게 인테리어 작업을 마친 후 첫 안식일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안식일 오전 예배에 참석할 사람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 한분, 그리고 아기엄마 둘이었다. 게다가 정자동 할머니가 혼자 버스를 타고 40분이나 걸려서 하차한 후 교회까지 걸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갓난 아기를 막 출산한 두 자매도 아기를 안고 버스를 타고 교회까지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모든 형제들은 모두 직장에 매여 있었다. 그러니 참석자가 없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전 예배를 드리기로 결정했다. 금요일 오후까지 예배 준비를 모두 마쳤고 안식일 오전이 밝았다. 그렇게 우리 내외, 할머니, 두 자매와 두 아기 그렇게 7명으로 전세 얻은 회당에서 안식일 오전 첫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년 뒤 예배 인원은 15명이 되었고 수세자도 다섯 명이나 되었다. 수세자는 박지영 문지혜 자매와 백소영 어린이 백하영 아기 최종민 아기 이렇게 다섯 사람이었다.

    그 과거를 회상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숫자에 관심이 많고 연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의 열매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에 굴복하고 사는가? 아니면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보고 있는가? 무엇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합당한 눈일까? 오늘은 제자들에게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 중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라는 이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고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우리는 어떤 가치를 평가할 때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의견을 수용하고 소수의 의견은 버린다. 이렇게 다수의 의견에 의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을 다수결의 원칙이라고 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사회에 태어나 그것에 익숙한 우리는 그것에 매우 친숙하다. 그런데 이 성향은 종교를 선택하는 일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수의 사람이 다니는 교회, 다수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사상을 따르려고 한다. 그러나 종교를 선택하고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는 과연 그것이 합당한 기준인가? 그렇지 않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다수결의 맹점이 발견된다. 20세기까지 지구상의 절반의 나라들은 사회주의 사상에 현혹되어 공산주의 국가체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국가의 붕괴와 함께 그 사상은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이렇게 다수의 사람들이 좇았지만 그것은 허상이고 합당치 않은 것이라는 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또 중세 역사 속에 마녀사냥이 있었다. 유럽의 종교전쟁과 30년 전쟁, 그리고 페스트에 의한 팬데믹 기간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그 원인을 생각했다. 도대체 이 많은 재난과 재앙의 원인이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그 원인이 마법사, 마녀같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재난과 재앙이 임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미신적 결론에 도달한 결과는 암울했다. 죄없는 양민을 마법사나 마녀로 몰려 화형에 처했다. 소위 이것이 마녀사냥이다. 이 마녀사냥은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와 기타 유럽 전역으로 퍼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우매한 다수의 편견이 만들어낸 범죄의 역사였다.

    그런가하면 과학의 영역에도 다수결의 폐단이 있었다. 르네상스 문예부흥의 시대에 천체를 연구하는 과학자가 있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였다. 망원경으로 열심히 천체를 관찰하던 그는 태양과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를 천동설, 후자를 지동설이라고 한다. 지금은 지동설이 당연한 과학적 사실이지만 그 무렵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지동설 때문에 종교 재판에 회부된다. 지동설을 주장하고 죽을 것이냐 철회하고 살 것이냐의 기로에서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고 목숨은 구했다. 그러나 그는 법정에서 물러나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현대에 와서는 천동설을 믿는 바보는 아무도 없다. 이처럼 과학적 진리의 분별에도 우매한 다수의 판단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인류 역사 속에 오히려 다수가 미신에 빠져 범죄하고 다수가 우매한 결론에 도달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뿐만 아니라 성경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별다르지 않다. 노아 시대에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찬 세상을 보시며 한탄하셨다. 그래서 부패한 인류를 물로 멸망시키고자 하셨다. 이에 대해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벧전 3: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겨우 여덟 명이라’ 대단히 적은 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노아 홍수 시대에 절대 다수의 인류는 멸망하고 소수만 구원을 받은 성경의 역사가 있다.

    또 분열왕국 시대 아합 왕의 통치기에 이르러 유사한 사례를 발견한다. 당시 왕과 모든 백성들은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을 떠나 다른 이방 신도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진다. 왕국이 죄악으로 멸망해 가는 그 때에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신앙 회복을 위해 갈멜산에서 다수의 거짓 선지자들과 대결한다.

    (왕상 18: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인이로다』

    사백오십 인과 한 사람, 절대 다수와 절대소수가 대조되고 있다. 엘리야 선지자는 바울 선지자 사백오십에 아스다롯 숭배자 사백인을 합해 총 팔백 오십 인과 대결한다. 그 대결에서 승리하고 우상 숭배한 선지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처럼 세상의 인류 역사 속에서도 또 성경의 역사 속에서도 우매한 다수가 얼마나 악한 열매를 맺게 되는지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오히려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별과 선택이 진리인 경우를 본다. 그렇다고 소수이기 때문에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가?그렇지 않다. 다수가 진리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듯이 소수도 진리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초점은 수적인 규모가 진리와 거짓의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진리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분명한 것은 진리란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듯이 진리를 시대를 초월해서 변하지 않아야 한다. 따라서 진리의 기준도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사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은 구원과 멸망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거짓과 진리의 기준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종종 복음을 전할 때 이런 고민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당신들이 전하는 세례에 대해서, 성령에 대해서, 안식일에 대해서 모두 성경과 일치하는 진리인 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많은 기독교회와 교인들이 다 지옥에 간다는 말입니까?” 이 의문에는 두 개의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안다. 반면 이미 익숙한 다수결의 원리가 기준이라는 생각도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마음속에서 서로 충돌할 때 이런 의문을 제기한다. 저는 장로교회에서 본교회로 개종하면서 이런 질문을 했었다. 이런 고민의 상황에 처한다면 어디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바울 사도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인물이다. 그에게도 마음 속에 그러한 고민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고민 가운데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로마서에서 바울은 한 가지 난제가 있었다. 그 난제로 고민했다. 그 고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은 택함받은 백성인데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왜 그들은 그분을 거절했는가였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구원하시려고 선민으로 택하셨는데 메시야를 거절했으니 그들에게는 구원이 없는 것이 명확하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 속에 이런 의문이 생겼다. “그러면 유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헛된 것인가? 모두 거짓말인가?” 바울의 결론은 신실하신 하나님이 그럴 리 없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남은 자에서 답을 찾아냈다.

    (사 10:20-21) 『[20]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남은 자란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지 않고 가나안 땅에 남아있던 자들, 또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본토로 돌아온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사야서에 기록된 ‘남은 자’를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마치 구약 시대에 그 남은 자가 있었듯이 사도시대에도 대부분의 유대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했지만 소수의 유대인들이 받아들이고 믿었다. 그 소수의 유대인들이 바로 사도시대의 ‘남은 자’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해석은 오늘날에도 역시 유효하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남은 자처럼, 바울 사도 시대의 남은 자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자들, 복음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는 자들이 바로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그래서 사도시대의 세례, 사도시대의 성령, 사도시대의 안식일이라는 진리를 붙들고 있는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남은 자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 성도님들은 바로 내가 이 시대에 남은 자라는 의식이 있는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참예수교회는 척박한 가나안 땅처럼 보인다. 소수이고 결핍되고 풍요롭지 않다. 그러나 살아계신 성령이 계시고, 진리의 말씀이 있고, 신도들의 순수한 삶의 모습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소유요 재산이다. 그 소유와 재산의 가치를 깨닫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자.

    엘리야 선지자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제물을 살랐을 뿐 아니라 칼로 그 우상숭배의 선지자들을 다 죽였다. 그런데도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다.

    (왕상 19:4)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 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엘리야 선지자의 이런 비관과 절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왕상 19:14) 『저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열심이 특심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

    엘리야의 눈에는 갈멜산의 승리 뒤에 세상에 변화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합왕이 재를 뒤집어 쓰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도 않았다. 백성들이 우상을 다 불태우고 하나님께 돌아온 것도 아니다. 오히려 왕후 이세벨이 죽이겠다고 협박까지 한다. 엘리야는 이런 상황을 놓고 크게 실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만 남았으니 죽여달라고 했다. 극도의 비관과 절망을 토로한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

    (왕상 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나님은 엘리야의 눈에 발견되지 않는 칠천인의 존재를 말씀하셨다. 구약의 엘리야 선지자 시대의 이 사건에 대해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를 기록할 때 이렇게 인용한다.

    (롬 11:3-5)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5]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바울사도는 엘리야 시대에 겉으로는 엘리야 선지자 하나만 남은 것으로 보였지만 하나님이 칠천을 남기신 것처럼 오늘날에도 그 수가 많건 적건 남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바울 사도가 구약 역사에 대한 인식과 해석이 그렇다면 오늘날 참예수교회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해석도 그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육적인 이스라엘은 세계 인구의 0.25%인 천 이백 만 밖에 안된다. 그러나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45%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백대 부호 중에 20%가 유대인이다.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좌지우지하는 민족이 바로 이 소수의 유대민족이다.

    (신 7: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육적인 이스라엘도 이러하나 영적인 이스라엘인 참예수교회도 육적인 눈으로 볼 때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는다. 지구상의 70억 인구 중에서 60여만 명은 사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비율이다. 절대 소수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영적인 이스라엘이요, 인류사의 끝에 있는 남은 자들이다.

    (눅 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신약 시대에 영적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진리는 소수일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없어지거나 죽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은 자로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한 살아서 역사하실 것이다. 그 미래를 이루기 위해서 성도님들은 말세의 남은 자로 선택되었다. 엘리야 시대에 남은 자처럼, 사도 시대에 남은 자처럼, 하나님은 말세의 남은 자인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실 것이다. 그 믿음으로 자기 정체성을 세우시고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한다.

    https://youtu.be/WxgvNVHMhKU?si=a0TpuieHnMB_2G-W

    글작성 : 김세한 목자